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영화리뷰] 시대가 지나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진부하고도 새삼스런 이러한 사실을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영화 <마지막 황제>는 제60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해 9개 부문을 모두 휩쓸며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청나라 12대 황제로 즉위한 '푸이'가 역사의 회오리 속에 휘말려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하는 자전적 영화다.

엑스트라 1만 9천여명, 유럽인의 눈에 비친 중국은?
  감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영화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인이 중국인의 드라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슈가 됐다. 엑스트라만 1만 9000여명. 중국 베이징과 자금성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한 나라를 휘어잡은 당대의 최고 황제가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하다니. 이보다 더 소설같고 영화같은 스토리가 어딨겠는가. 

  영화는 주인공의 삶을, 과거-현재를 오가며 중첩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첫번째 장면은 황제의 '오늘'에 대한 모습이다. 한 남자가 화장실에 들어가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곧 미수에 그치고 만다. 그의 이름은 푸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황제다.

  여기에서 영화는 푸이의 어린시절, '과거'로 넘어간다. 1908년 3살의 푸이는 최고의 권력자인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후계자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다. 푸이가 황제가 된 후,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여인 서태후는 숨을 거둔다. 청나라의 황제가 된 푸이는 6세까지 내시와 궁녀들 사이에서 성장한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푸이는 퇴위하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는 자금성 밖을 외출할 수 없게되었는데, 이 즈음 자금성 밖에서는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푸이는 궁밖에 나섰다가 변화한 시대의 흐름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 아니, '우물 안 황제'였던 것이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정원사가 되기까지
   꼬마 황제 푸이가 14세 되던 해, 영국인 가정교사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금성 안으로 들어온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들여와 황제에게 주고 안경을 쓰게 하는 등 신식물건을 접할 수 있게끔 도와 준다. 아주 능숙한 영어로 가정교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푸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마음 속에 품은 신식문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오랜 관습에 반발하면서도 그는 17세의 완용공주를 황후로, 12세의 문연공주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그의 부인들은 마치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낸다.
  1924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푸이는 추방되는 동시에 반역죄로 감시받는 신세가 된다. 푸이는 두 아내와 함께 톈진으로 도피하고 후실은 문연공주는 푸이의 곁을 떠난다. 


  푸이는 다시 권력을 잡고 싶어 한다. 황제가 되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일본에게 기대기 시작한다. 완용공주는 그런 황제에게 실망하고 경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미 공주 역시 아편에 입을 대면서 점점 망가져만 간다.  일본의 획책에 넘어간 푸이는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되지만, 결국 만주국은 멸망하고 푸이는 소련의 전범 수용소로 송치된다. 
  1950년 소련에서 중국으로 후송된 푸이는 공산정권에 의해 10년간 재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식물원의 정원사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영화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먼나라 이웃나라-중국편> 추천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영화에 집중하다보면 곧 스토리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중국사에 무지한 사람이라,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증이 많이 일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자 마자 영화속 배경이 된 사건들과 그 시기의 중국의 상황을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도움이 되었던 책이 바로 이원복 교수가 쓰고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중국편>이다. 검색하면 중앙일보에 게재했던 만화를 원본으로 볼 수 있다. 근대편을 읽고 현대편을 읽으면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정립되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서 당시 중국의 상황이 이해되면서 중국사에 대한 흥미가 더욱 증폭됐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를 보며 고종을 떠올리다
  내가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중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처럼 다른 관객들도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볼까 한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고종'이다. 누군가는 영친왕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아니던가. 그러나 사실 영친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고 실제로 왕이 되지는 못했기에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과 빗대고 싶다.

  유럽 열강과의 문호 개방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갑오개혁을 단행한 후 일본의 힘을 빌려 내정개혁을 하고자 했으나 결국 일본에 의해 제거(?) 당한다. 푸이 역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일본의 도움을 얻어 황제가 되지만 결국 꼭두각시처럼 이용만 당하고 만다.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지 못하고 열강의 힘을 빌려야만 했던 나약했던 왕. 결국 이용당하고 버려졌던, 백성들에게 까지 미움을 받아야만 했던 왕. 이런 슬픈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고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푸이는 만주를 떠나 톈진에서 신식문물에 무섭게 파고든다. 그동안 참았던 호기심과 욕망, 욕구들이 분출하고만 것이다. 신식 양복을 차려입고, 음악에 맞춰 서양인들과 댄스를 추고, 술이 빠지지 않는 사교의 장으로 흠뻑 빠져든다.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 시각, 백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시대의 흐름은 무엇을 요구하는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왕위에 오르고 싶었던 푸이는 일본의 도움을 얻어 왕권을 되찾는다. 그러다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 결국 공산정권에 의해 왕권을 빼앗기도 만다. 

왕에서 평민으로. 어쩌면 후련하지 않았을까?
  정신교육을 받는 동안의 푸이의 모습은 정말 안쓰럽다. 이 나약한 사내를 누가 황제라고 믿겠는가! 어릴 적부터 최고의 권력을누리고 있던 그는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다. 먹는 것, 입는 것, 이동하는 것까지 신하들의 시중이 있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평민이 되기는 힘들 터.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때 신하였던 이의 시중을 받고 생활한다.

 그것을 지켜봤던 교도관이 푸이를 단체방으로 쫒아버리고 그 속에서 푸이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혼자만의 삶을 살아간다. 다함께 어울려야 하고 혼자 옷을 입어야 하고 혼자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굴욕도 설움도 다 참아야만 한다. 명령 하나로 움직이고 복종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아니기에. 

  "나는 이제 당신의 신하가 아니야!"라고 말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잊혀지질 않는다. 그제서야 푸이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더이상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굴욕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0년의 시간이 지나 사상교육을 받고 평범한 정원사가 되어 퇴소한 푸이. 아무도 그가 '황제'였단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루하루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원을 가꾸던 그 사이에도 중국은 여러번의 변화를 맞이한다. 모택동이 중국이 정권을 잡고, 마지막 황제도  만주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기구한 삶이 있을까. 선택 받아 황제가 되어, 황제로 살다, 정원사가 된 사내 푸이. 영화를 보는 내내, 평범한 삶은 어째서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어린 소년에겐 엄마가 필요했고, 또래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 노는 게 중요했고, 넓은 세상이 궁금했다. 그러나 황제라는 이유로 견디고 참고 현명해야 했다.
  그 모든 폭력들을 견디지 못해 푸이는 결국 '자폭'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푸이의 마지막은 생은 황제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어서 더욱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식물을 돌보며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을 터이니 말이다. 비록 역사의 한페이지에 '훌륭한 황제'로
장대하게 기록되지 않을지라도.


[몇 가지 더]
1. 이 영화의 바탕이 된 책이 푸이가 직접 쓴 자서전 <나의 전반생>이라는 책이다. 한국어로  번역돼 국내에 출판 되었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단다. 대신 <마지막 황제>라는 책이 출판되었다고 하니 구입해서 읽고 싶다.

2. 영화 <마지막 황제>의 ost는 굉장히 유명하다. 대표적인 음악이 바로 <레인(Rain)>인데, 실제로 영화에서는 한 장면에서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후실인 문연공주가 신식문물에 도취돼 왕을 떠나는 장면이 유일하다. 웅장하면서도 가슴 아린 선율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문연공주의 모습 위로 울려 퍼진다. 비가 오는데도 아랑곳 않고 마당으로 뛰쳔간 문연공주. 그녀의 모습은 아슬아슬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3. 배우들은 전부 영어로 대사를 읊는다. 중국에서 만든 영화가 아닌 유럽인의 눈으로 그려지고 제작된 영화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에 황제를 비롯한 관료들이 모두 영어를 이렇게 잘했을리는 없다. 단지 영화 배급의 용이성과 관객들의 다양성을 고려해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한 것 같다. 배우들 모두 영어를 엄청 잘하던데, 배운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잘하는 이들을 배우로 고용한 것일까. 그게 가장 궁금하다.

4. 푸이에 대해 궁금한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그에 대한 짤막한 연보도 함께. 이렇게 짤막하게 설명하기엔 그의 삶이 얼마나 기구한다. 가슴을 파고드는 청년의 삶. 영화에서 확인하라.

 

푸이 [溥儀, 1906.2.7~1967.10.17]

 
중국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1908년 3살의 나이로 청(淸)의 12대 황제가 되었지만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하였다. 1934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련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인디애니박스 <셀마의 단백질 커피>

최근 <돼지의 왕>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독립영화계에 바람을 일으키며 사람들에게 신선한 잔혹함(?)을 안겨주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전, 단편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은 단백질>이다.

하나만 달랑 개봉할 순 없으니 다른 단편 애니메이션 두편과 함께 짝을 맞춰 장편분량으로 러닝타임을 맞췄고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했다.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연상호 감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나의 관심은 오로지 최규석 만화가에게서 비롯됐다. 그가 그린 만화라면 항상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규석 만화가를 알고 있나요?









최규석. 197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으며, 상명대 만화컨텐츠학부를 졸업했다. 그가 펴낸 첫 단행본은 <아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로 한국 만화 계에 당돌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히치스러우면서도 정감 있는 그의 그림 속에는 이 사회의 소수자들이, 약자들이 담겨 있었다.

 

이후 경향신문과 한겨레 신문에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원주민>와 같은 작품을 연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탄탄히 만들어 간다. 5.18 광주항쟁 이야기를 담은 <100도씨>를 펴냈고, 작년엔 <울기엔 좀 애매한>이라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펴냈다.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시각으로 그려내는 최규석의 만화가 나는 참 좋았다. 그가 펴낸 작품들은 다 읽을 정도로 그의 팬이 되었다.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의 합작품 <사랑은 단백질>

단편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은 최규석 만화가의 작품이 원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위한 장르라 말한다. 그렇지만 <은하철도 999>나 <스머프>, 혹은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에서 만든 만화영화에서 알 수 있듯, 애니메이션은 때로 기존 영화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명확하다.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만화영화가 아름답고, 희망적이고, 깨끗한 이야기만 담아야 한다는 편견은 버리는 게 좋을 듯 싶다. (버리기 싫다면 헐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을 보세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등)


귀엽고 앙증맞은 그림, 상상력을 발휘한 등장인물에만 집중한다면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놓칠 수 있다. 가끔씩 살을 파고드는 무서우리만큼 섬뜩한 설정들. 이토록 재밌고 영리하고 섬뜩한 애니가 과연 있을까.


<원티드> 태풍이 휩쓸고간 자리, 무능력한 위정자


이 영화, 실은 제목이 너무 난해하다. <셀마의 단백질 커피>!!!! 잉,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단편 3개의 내용을 요약한 제목이었다.

<원티드>는 평화롭고 나른한 마을에 어떤 무서운 노파가 몰고온 태풍으로 고난에 빠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노파는 태풍 '셀마'를 의미한다. 지명수배자로 일컬어지는 '셀마'를 통해 한국의 정치상황을 빗댔다.

이를테면 이렇다. 태풍으로 마을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뗏목에 의지해 바다인지, 마을인지 모를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닌다. 그때, 경찰청장(혹은 동장) 비스므리한 권력을 쥔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이라 생각하며 환호하지만, 그는 시간이 없다며 구호물품만을 던지고 가버린다. 박스 안에 든 것이 음식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곧 절망한다. 박스 안에는 인형들만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실리는 따지지 않고 보여지는 것만, 절차만 중시하는 정치인들.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주민들과 그들의 불신이<원티드>에 아주 잘 담겨 있다.

<사랑은 단백질> 치킨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라

<사랑의 단백질>은 세상의 모든 치킨들이 지니고 있는 사연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분간 닭은 입에도 대기 싫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은 닭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고?

그러니까, 영화는 자취생 청년 셋(재호, 경순, 홍찬)이 돼지 저금통을 탈탈 털어 치킨을 배달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잠시 후, 족발집의 돼지가 대신 닭을 들고 배달을 오고, 돼지를 뒤늦게 따라온 닭사장은 배달된 치킨이 바로 자신의 아들 '닭돌이'라며 대성통공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청년들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 한 청년은 식욕을 잃어버리고 닭 사장의 마음에 동화돼 그저 눈물만 흘린다. 그러던가 말던가 다른 청년은 닭돌이의 다리를 쫙 찢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먹는다. 나머지 청년 하나는 미적미적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닭을 먹는다. 그리곤 눈치 없이 굴던 친구를 타박한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대사 하나. 시종일관 눈치 없이 입맛만 다시고 침 흘리던 친구 재호에게 누군가가 "너는 눈치가 없어서 참 좋겠다"라고 말한다. 남이 아프던 말던, 누가 죽던 말던 오로지 자기 배 채우는데 관심이 있는 녀석. 본성이 나쁘다, 착하다의 문제가 아닌 '눈치'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잉여인간. 과연 우리는 재호를 비난하고만 있을 수 있을까. .

비록 애니메이션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면 나는 과연 어떤 청년처럼 행동하게 될까. 그것을 생각하며 애니를 본다면 재미는 두배가 될 것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 커피자판기, 사랑에 빠지다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만화적 상상력이 깊이 가미된 영화다. 무림제일검이라 불리던 검객 진영영은 강적과의 대결 끝에 죽고, 소원대로 강철로 환생한다. 그런데!!! 하필 커피자판기다. 가슴에서 따뜻한 커피를 만들어내고, 술을 먹으면 동정심이 많아지는 여자 혜미와 사랑에 빠진다.

자판기와 사람의 사랑이라. 정말 재밌고도 깜찍한 상상력이다. 커피자판기는 저녁만 되면 사람으로 변한다. 커피자판기와 인간의 사랑.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다룰 수 없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펼쳐지는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판기를 타고 혜미가 그 위에 앉아 하늘을 나는 장면, 참 예쁘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지브리스튜디오에서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의 한장면이 생각났다. 

주인공이 둘다 단발머리라는 점, 스커트를 입었다는 점, 발랄하다는 점이 같다. 다른 점은 혜미는 자판기를 타고 날아다니고 키키는 마녀답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것.

지금도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가면 꼭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곤 한다. 때론 난해하고 때론 대책없이 귀여운 다양한 작품을 만나며 그때마다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꿈과 희망 대신, 현실에 대한 직시와 잠시 쉬어갈 여유 같은 것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름답다, 그러니 아름답게 살아라"가 아닌 "현실은 시궁창이다. 새삼스러워 말고 시궁창 같은 곳에서 인간답게 살아봐라"라는 제법 아프고 능청스럽게 삶에 대한 교훈과 철학을 주는 애니메이션. 이 작품을 꼭 봐야하는 이유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고뇌하며 읊조린 이 대사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아마 이 대사는 햄릿을 창작한 '셰익스피어'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햄릿>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상연 소식이 들렸을 때, 꼭 보고 마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티켓 값을 보고 절망했다. VIP석이 무려 20만원을 호가하는 것이 아닌가.(왜 나는 4등석도 있는데 꼭 VIP석만 생각하고 쉽게 절망했을까. 4등석은 4만원대인데 말이다).

망설이던 찰나, 트위터를 통해 출판사 '김영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응모했고 상품으로 뮤지컬 햄릿의 티켓을 선물 받았다. "앗싸!" 운이 좋았다. 기쁜 마음으로 지인과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된 햄릿

공연은 비극을 다룬 극 답지 않게 제법 경쾌하다. 삶과 죽음, 배신과 복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시종일관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뮤지컬은 체코의 국민가수 야넥 레덱츠키의 음악을 덧입혔다.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음악에, 젊은 배우들 역시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무대 위에서 한바탕 신나는 공연을 펼친다. 조연들의 유머 역시 상당하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을 따라부르게 할만큼 쉽고도 경쾌하다.



주인공들의 복장 역시 현대적이다. 햄릿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햄릿을 맡은 박은태는 검정색 가죽자켓에 검정색 가죽바지, 부츠를 착용했다. 머리는 웨이브 있는 컬을 넣었고 살짝 드러낸 가슴은 근육으로 탄탄하다. 현대판 햄릿의 모습인 것이다.

이렇듯 햄릿은 옛 모습 그대로 무덤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게 아닌, 옆집의 잘생긴 오빠처럼 우리들 곁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두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시대극이지만 무겁거나 동떨어지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까지 차지해 왕의 자리에 오른 삼촌를 미워하는 햄릿은 매일 밤마다 유령인 아버지를 만나며 고통스러워 한다. 아버지는 음성으로 꿈으로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이 실은 동생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데 이때부터 햄릿은 삶의 모든 것을 '복수'에 둔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구렁텅이같은 삶에서 햄릿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복수! 복수 뿐.

이런 걸 아는걸까 모르는걸까, 왕은 햄릿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햄릿은 자주 철없고 덜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철없는 남동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원작에서의 햄릿은 삶에 대해 고뇌하고 분노하는 어두운 인물로 표현됐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도 저지르고 변덕도 심한 인물로 표현된다. 명랑하게 춤추고, 상대방을 거침없이 비꼬는 등 분노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대사도 그렇다. 원작에서 햄릿은 철학적인 사고로 삶에 대해 논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고통은 큰 물결을 무기로 맞닥뜨려 끝내버리는 그 어느 것이 더 떳떳한 생각일까?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잠들면 마음의 아픔과 육체가 겪는 수많은 충격이 끝난다고 말한다. 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결말이다.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그렇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은 "산다는 건 연극 같아. 죽는 건 잠시 잠드는 것일뿐"이라며 짧고도 단순하게 노래로 읊조린다. 그리고 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쉽게 다가온다. 정말이지 때때로 삶은 연극 같은 때가 많으므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 오필리어

<햄릿>을 읽을 때마다 가장 마음이 아프고 가여운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오필리어'다. 끊임없이 햄릿의 구애를 받고 마음을 열었지만 정작 햄릿으로부터 버림 받는 비운의 주인공.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빠마저 잃어버린 오필리어는 결국 서서히 미쳐간다.


오필리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 바로 이 그림이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렸다.

원작 소설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을 알리는 대목을 찾아 보았다. 햄릿의 엄마인 왕비가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에게 죽음을 알리며 장면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그림과 유사하다. 그대로 옮겨 보겠다.

<하얀 잎사귀를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치면서 시냇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애는 거기서 미나리아재비랑 쐐기풀이랑 데이지랑 자란으로 이상한 화관을 만들었다. 자란을, 무식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얌전한 처녀들은 사인지라고들 부르지. 아무튼 그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올라갔다가 심술궂은 은빛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옷자락이 활짝 펴져서 마치 인어처럼 물에 한참 둥실둥실 떠 있었지. 그 동안에 그애는 옛 찬송가를 토막토막 불렀는데, 절박한 불행도 아랑곳없이, 마치 물에서 자라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단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갈리 없지. 물이 배어 무거워진 옷이 그 가엾은 것을 물 속에 진흙 사이로 끌고 들어가 버리고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말았다.>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뮤지컬에서 오필리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다. "그건~ 사랑"이라며 반복되는 노래는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사랑을 갓 시작한 이의 심정이 되어 저절로 미소를 띠게 된다.

그러나 오필리어가 햄릿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되었을 것이다. 햄릿에게 이별을 선고받고 혼자 남겨진 오필리어는 그만 미쳐 버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꽃 화관을 쓰고 연못 속에 빠져 죽는다.

뮤지컬에서는 오필리어가 연못이 아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에 연못을 꾸미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대안이 아닐까. 오필리어가 자살을 한 건지, 아니면 미친 나머지 정신을 읽고 그만 발을 헛디뎠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아마 말은 안해도 오필리어 역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되뇌었을 것 같다.

햄릿이 죽는 순간, 슬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표현 방식만 차이 있을 뿐, 뮤지컬은 원작의 스토리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했기에 극이 던지는 메시지의 무게를 최소화 됐으며 군데군데 잔재미를 첨가됐다.

그 덕분에 뮤지컬은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작품이 되었지만 역으로 아쉬운 측면도 많다. 약간은 코믹하고 느슨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탓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특히, 엔딩 장면. 햄릿과 레어티즈의 싸움. 이 부분이 조금 더 치밀하고 묘사적이고 길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순간의 왕과 왕비의 심리적 표현도 구체적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모두가 다 죽어버리는 마지막 장면, 자칫 허무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도 너무 빠르게 전개된 나머지 정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래서일까, 뮤지컬의 막이 내리고 기억에 남는 건, 마치 '하이마트' cf를 보듯 귀에 익숙하고 발랄한 노래 뿐.

적어도 햄릿이 죽는 그 순간엔 눈물을 흘리게 되길 바랐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물론, 아쉬움 이상으로 만족감이 훨씬 더 크다.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뮤지컬을 보는 내내 햄릿에게 친근감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고전 속의 주인공으로 접할 때는 마치 할아버지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다루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을 통해 만난 햄릿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젊은이었다. 친구라는 생각이 들자,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뮤지컬을 보고 들어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책을 꺼내 들었다. 비운의 주인공 햄릿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셰익스피어는 정말 훌륭한 스토리텔러였구나"하는 생각. 너무 존경스럽다.

경쾌한 음악과 신나는 댄스, 멋있는 주인공들과 개성 강한 조연. 모든 것이 잘 배합된 훌륭한 공연이었다. 햄릿과 조금 더 친해져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