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고뇌하며 읊조린 이 대사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아마 이 대사는 햄릿을 창작한 '셰익스피어'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햄릿>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상연 소식이 들렸을 때, 꼭 보고 마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티켓 값을 보고 절망했다. VIP석이 무려 20만원을 호가하는 것이 아닌가.(왜 나는 4등석도 있는데 꼭 VIP석만 생각하고 쉽게 절망했을까. 4등석은 4만원대인데 말이다).

망설이던 찰나, 트위터를 통해 출판사 '김영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응모했고 상품으로 뮤지컬 햄릿의 티켓을 선물 받았다. "앗싸!" 운이 좋았다. 기쁜 마음으로 지인과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된 햄릿

공연은 비극을 다룬 극 답지 않게 제법 경쾌하다. 삶과 죽음, 배신과 복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시종일관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뮤지컬은 체코의 국민가수 야넥 레덱츠키의 음악을 덧입혔다.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음악에, 젊은 배우들 역시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무대 위에서 한바탕 신나는 공연을 펼친다. 조연들의 유머 역시 상당하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을 따라부르게 할만큼 쉽고도 경쾌하다.



주인공들의 복장 역시 현대적이다. 햄릿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햄릿을 맡은 박은태는 검정색 가죽자켓에 검정색 가죽바지, 부츠를 착용했다. 머리는 웨이브 있는 컬을 넣었고 살짝 드러낸 가슴은 근육으로 탄탄하다. 현대판 햄릿의 모습인 것이다.

이렇듯 햄릿은 옛 모습 그대로 무덤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게 아닌, 옆집의 잘생긴 오빠처럼 우리들 곁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두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시대극이지만 무겁거나 동떨어지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까지 차지해 왕의 자리에 오른 삼촌를 미워하는 햄릿은 매일 밤마다 유령인 아버지를 만나며 고통스러워 한다. 아버지는 음성으로 꿈으로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이 실은 동생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데 이때부터 햄릿은 삶의 모든 것을 '복수'에 둔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구렁텅이같은 삶에서 햄릿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복수! 복수 뿐.

이런 걸 아는걸까 모르는걸까, 왕은 햄릿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햄릿은 자주 철없고 덜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철없는 남동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원작에서의 햄릿은 삶에 대해 고뇌하고 분노하는 어두운 인물로 표현됐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도 저지르고 변덕도 심한 인물로 표현된다. 명랑하게 춤추고, 상대방을 거침없이 비꼬는 등 분노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대사도 그렇다. 원작에서 햄릿은 철학적인 사고로 삶에 대해 논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고통은 큰 물결을 무기로 맞닥뜨려 끝내버리는 그 어느 것이 더 떳떳한 생각일까?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잠들면 마음의 아픔과 육체가 겪는 수많은 충격이 끝난다고 말한다. 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결말이다.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그렇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은 "산다는 건 연극 같아. 죽는 건 잠시 잠드는 것일뿐"이라며 짧고도 단순하게 노래로 읊조린다. 그리고 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쉽게 다가온다. 정말이지 때때로 삶은 연극 같은 때가 많으므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 오필리어

<햄릿>을 읽을 때마다 가장 마음이 아프고 가여운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오필리어'다. 끊임없이 햄릿의 구애를 받고 마음을 열었지만 정작 햄릿으로부터 버림 받는 비운의 주인공.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빠마저 잃어버린 오필리어는 결국 서서히 미쳐간다.


오필리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 바로 이 그림이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렸다.

원작 소설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을 알리는 대목을 찾아 보았다. 햄릿의 엄마인 왕비가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에게 죽음을 알리며 장면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그림과 유사하다. 그대로 옮겨 보겠다.

<하얀 잎사귀를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치면서 시냇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애는 거기서 미나리아재비랑 쐐기풀이랑 데이지랑 자란으로 이상한 화관을 만들었다. 자란을, 무식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얌전한 처녀들은 사인지라고들 부르지. 아무튼 그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올라갔다가 심술궂은 은빛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옷자락이 활짝 펴져서 마치 인어처럼 물에 한참 둥실둥실 떠 있었지. 그 동안에 그애는 옛 찬송가를 토막토막 불렀는데, 절박한 불행도 아랑곳없이, 마치 물에서 자라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단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갈리 없지. 물이 배어 무거워진 옷이 그 가엾은 것을 물 속에 진흙 사이로 끌고 들어가 버리고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말았다.>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뮤지컬에서 오필리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다. "그건~ 사랑"이라며 반복되는 노래는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사랑을 갓 시작한 이의 심정이 되어 저절로 미소를 띠게 된다.

그러나 오필리어가 햄릿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되었을 것이다. 햄릿에게 이별을 선고받고 혼자 남겨진 오필리어는 그만 미쳐 버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꽃 화관을 쓰고 연못 속에 빠져 죽는다.

뮤지컬에서는 오필리어가 연못이 아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에 연못을 꾸미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대안이 아닐까. 오필리어가 자살을 한 건지, 아니면 미친 나머지 정신을 읽고 그만 발을 헛디뎠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아마 말은 안해도 오필리어 역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되뇌었을 것 같다.

햄릿이 죽는 순간, 슬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표현 방식만 차이 있을 뿐, 뮤지컬은 원작의 스토리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했기에 극이 던지는 메시지의 무게를 최소화 됐으며 군데군데 잔재미를 첨가됐다.

그 덕분에 뮤지컬은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작품이 되었지만 역으로 아쉬운 측면도 많다. 약간은 코믹하고 느슨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탓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특히, 엔딩 장면. 햄릿과 레어티즈의 싸움. 이 부분이 조금 더 치밀하고 묘사적이고 길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순간의 왕과 왕비의 심리적 표현도 구체적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모두가 다 죽어버리는 마지막 장면, 자칫 허무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도 너무 빠르게 전개된 나머지 정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래서일까, 뮤지컬의 막이 내리고 기억에 남는 건, 마치 '하이마트' cf를 보듯 귀에 익숙하고 발랄한 노래 뿐.

적어도 햄릿이 죽는 그 순간엔 눈물을 흘리게 되길 바랐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물론, 아쉬움 이상으로 만족감이 훨씬 더 크다.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뮤지컬을 보는 내내 햄릿에게 친근감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고전 속의 주인공으로 접할 때는 마치 할아버지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다루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을 통해 만난 햄릿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젊은이었다. 친구라는 생각이 들자,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뮤지컬을 보고 들어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책을 꺼내 들었다. 비운의 주인공 햄릿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셰익스피어는 정말 훌륭한 스토리텔러였구나"하는 생각. 너무 존경스럽다.

경쾌한 음악과 신나는 댄스, 멋있는 주인공들과 개성 강한 조연. 모든 것이 잘 배합된 훌륭한 공연이었다. 햄릿과 조금 더 친해져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