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는 매우 다른 영화 <은교>
소설과는 매우 다른 영화 <은교>
개봉 전부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영화 <은교>를 드디어 보았습니다. 배우 박해일의 열혈 팬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관심 갖지는 않았습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영화 안 보신 분들, 무시무시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안심하셔요.)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다
원작이 되는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를 보면 실망이 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감동을 영상이 따라가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아파트>를 비롯한 강풀 시리즈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공지영의 <도가니>는 영화로도 아주 잘 봤고, 김려령의 <완득이> 역시 신나게 봤으니까요. 이 영화 <은교>를 앞선 두 종류의 영화에 빗대자면,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자’입니다. 실망이 좀 더 컸거든요.
박범신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동영상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예고편을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박해일이 원작 소설을 읽어주는 동영상을 보고 그만 문장에 ‘뿅’ 갔습니다. 굵고 차분하고 또렷한 배우의 음성이 문장을 살아 숨 쉬게 했습니다. 소설을 귀로 듣는 다는 것,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더라고요.
주말 동안 뚝딱 완독했습니다. 상당히 아름답더군요. 박범신 작가의 책은 처음 읽는 거였어요. 그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은 게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문장에 푹 빠진 상태에서 한껏 기대해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소설에 대한 평은 따로 올리겠습니다.)
소설에서 모티브만 따왔을 뿐
영화 <은교>는 소설과 매우 다른 영화.
감히 영화를 평론할 깜냥이 제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영화 평론 과정’ 수업을 돈 내고 수강하다가 중도하차 했겠어요. 영화를 평론하려면 굉장히 똑똑하고 철학적이며,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야겠더라고요. 제겐 어림없는 일이죠. 그러니 이 점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이 글은 평론이라기 보단 ‘사적인 느낌’입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와 매우 다릅니다. 소설 <은교>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으로 이뤄졌습니다. 시인 이적요가 죽고 나서 일 년 후, 변호사는 “내가 죽은 후 일 년 뒤 공개하라”는 유언에 따라 죽은 시인의 노트를 읽어 내려갑니다. 그 안에 은교와 제자 서지우와의 관계, 시인이 느꼈던 감정의 동요, 놀라울만한 사실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소설은 변호사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다 이적요의 노트의 내용을 공개하며 이적요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소설은 자유자재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스릴러 책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생기고 뒷이야기가 매우 궁금해지는 까닭은 그러한 구성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의 전개방식과 다릅니다. 하긴 상상해보건대, 그러한 설정을 따랐다면 굉장히 산만하고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변호사가 등장해서 낡은 노트를 꺼낸다.→노트를 읽는다→이적요가 등장한다→이야기가 전개된다→변호사가 다시 등장하며 현재로 넘어간다’. 얼마나 산만하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영화는 ‘이적요의 노트 속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고생 은교를 어떻게 알게 됐고, 각별히 아꼈던 제자 서지우와는 어떻게 갈등을 겪게 되는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일흔 살 노인과 여고생의 사랑’ 정도로 정의 내리려는 것 같습니다. 혹은 ‘여고생을 둘러싼 일흔살 노인과 제자와의 삼각관계’로 말예요. 충분히 자극적이고 대중적이고 재밌기까진 하지만 이렇게만 보기에는 뭔가가 아쉽습니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적요에게 은교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사랑하는 여인? 아니면 소설에 나와 있듯 나의 처녀? 글쎄요, 무엇으로도 정의내리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갈래들이 줄기를 뻗어 뒤엉켜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느낀 바로는 이렇습니다. 이적요는 은교를 성모마리아와 같은 ‘동정녀’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순결무구한 존재로요. 동정녀 성모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정녀지요. 그런 ‘절대 순결’의 존재로 은교를 여긴 게 아닐까 해요.
그렇기에 은교를 함부로 만질 수도 훼손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리도 믿었던 서지우에게 비록 훼손당했다 하더라도 은교는 이적요에게 ‘영원한 처녀’입니다. 시에서 훼손할 수 없는 절대성, 정신적 가치처럼 말예요.
하여간 이적요가 은교에게 갖는 감정은 복잡다단합니다.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가 멀어지고 갈등하고 의심하게 되는 과정 역시 ‘질투 때문’이라 단정 지으면 상당히 곤란합니다. 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납득하실 겁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이들의 감정과 갈등이 다소 단순하게 그려집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에피소드 역시 소설과 매우 다릅니다. 하긴,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이야기를 전개시켜야하니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연출을 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이건 소설이 아닌 영화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영화 <은교>를 소설에서 인물설정과 제목만 따온 별개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영화를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도가니> 같은 경우엔 원작소설과 80% 이상이 내용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은교>는 아닙니다. 정지우 감독의 재능과 판타지를 엮은 아주 다른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참 많네요. ‘이건 소설과 달라. 영화는 그냥 영화야’라곤 해도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문장의 웅장함과 힘이 영상으로도 고스란히 재현되길 바라는 ‘팬심’은 어쩔 수 없겠지요.
젊음이 그저 얻어졌듯, 늙음은 죄가 아니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문장은 영화에도 나옵니다. 이적요가 서지우의 ‘이상문학상’ 시상식에 가서 축사를 하지요. 그때 그 대사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이 문구에 밑줄을 그어뒀습니다.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감독 역시 영화의 주제를 이 문장에서 얻었나 봅니다. 늙음에 관한 편견, 그것이 주는 슬픔. 그리고 늙은 것은 범죄이거나 죄가 아니라는 것, 자연의 결과라는 것. 바로 이 문장에 집중해야만 이적요의 감정선을, 영화의 결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은교를 향한 남성 판타지를 한껏 끌어올리느라고요. 그래서 아마 몇몇 사람들이 이 영화를 외국 작품 <롤리타>와 연관 짓나 봅니다.
‘은교 앓이’ 여배우 김고은의 발견
여배우 김고은, 정말 이름처럼 곱더라고요. 남자들이 요새 ‘은교 앓이’ 중이라던데, 십분 이해합니다.
소설 속의 은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거나 굉장한 미인상이 아닙니다. 변호사는 은교를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눈빛은 깊다나요? 이런 캐릭터를 살리기란 참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은교는 김고은에게 고스란히 투영됐습니다.
살갗이 비칠 것 같은 투명한 피부에 군살 없는 미끈한 몸매, 잘록한 허리, 긴 팔다리 등의 몸매는 물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외모까지도요.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또렷한 요즘의 여배우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 김고은이 평소 존경한다는 ‘전도연’ 같은 배우로 대성해주길 기대해봅니다.
파격적인 노출까지 감행했지요.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다고 하네요. 김고은을 아끼는 은사는 이런 말을 했다지요. “영화를 찍는 순간, 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너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모쪼록 배우 김고은이 좋은 작품을 만나, 오래 오래 연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무열은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로 소문 나 있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좀 부족한 느낌입니다. 박해일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김무열 특유의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지요. 아마 영화에서의 비중이 큰 편이 아니어서 그런가 봅니다. 김무열도 자신에게 딱 맞는, 비중있는 역할을 만난다면 신들린 연기력을 펼치겠지요. 뭐, 아직 젊으니까요.
그리고 박해일. 8시간이 넘는 분장 끝에 노인으로 변신했다고 하지요. 영화 초반에 공개되는 몸은 대역이라고 하네요. 얼굴은 그렇다 치고 몸매까지 분장으로 감출 수는 없었을 거예요. 박해일의 얼굴은 괜찮았는데 목소리가 매우 어색했어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 목소리를 흉내 내듯 굵고 거슬리더라고요.
소설에서 이적요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노인으로 나옵니다. 180이 넘는 장신에 마르긴 했지만 체격도 다부지게 표현됐지요. 이런 설명대로라면 극중 박해일의 건장한 체격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마 소설 속의 이적요가 실제 인물로 부활한다면 눈빛이 형형하고 건장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었을 거예요. 하긴 기존의 젊은 배우 중 이적요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박해일 밖엔 없을 거란 생각도 해봅니다.
정지우 감독이 그랬다네요. “다음번에 <은교>를 한 번 더 찍는다면 진짜 70대 노인을 출연시키고 싶다”고요. 감독님께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감독님, 다음이란 없어요.”라고요.
한 마디 더 붙이겠습니다. “감독님 <해피엔드> 같은 작품 다시 만들어 주세요, 네?” 정지우 감독을 계속 지켜보렵니다.
[기타]
영화 <은교> 예고편입니다.
정지우 감독, 김고은, 박범신 작가(박범신 작가 멋지네요 흐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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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도 보았다는 연극 <서울사람들>
박원순 시장도 보았다는 연극 <서울사람들>
연극 '서울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앵콜공연이라네요. 친구가 당첨이 됐다며 함께 보러가자고 권했습니다. 제목만 들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연극 서울사람들 참 좋다더라. 박원순 시장도 봤대”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역시 유명인을 동원한 마케팅은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연극을 보자마자 왜 이 연극이 앵콜공연까지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따뜻합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되뇌이게 되는 연극입니다.
서울에서 발 딛고 사는 '서울사람들'
연극에서 ‘서울사람들’은 서울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토박이들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의 삶을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그립니다.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습니다. 아참, 조선족 처녀도 있습니다. 이들의 연령대는 2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합니다.
연극은 군데 군데 웃음의 요소가 들어있지만, 때때로 서글프고 날카롭습니다.
대학생 친구 두 명의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감 있고도 와 닿습니다.
졸업 전 취업을 목표로 학교를 휴학하고 고시원에서 토익을 비롯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여대생은 굉장히 히스테릭합니다. 작은 소음도 못 견딜 정도로 날이 서있고,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다 옆방에 살고 있는 청년이 대학교 동아리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순수하면서도 무모한 청년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대학생, 취준생, 조선족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
청년의 고향은 제주입니다. 제주사투리를 굉장히 리얼하게 쓰는 모습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고향이 제주거든요.(배우 고향이 제주도라고 80% 확신합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닙니다. 그 무시무시한 등록금 때문에 청년은 패스트푸드점 배달 알바를 합니다. 방세는 몇 달 밀려 방문 앞엔 빨간 딱지가 붙었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수업을 빠지기 일쑤입니다.
그런 청년을 옆방 친구가 몰아세웁니다. “차라리 대출을 받고 대학 먼저 졸업해! 지금 우리가 할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토익도 해야지, 학점도 받아야지, 스펙을 쌓아야 한다구!”
청년은 친구 말에 호스트바에서 일을 합니다. 단 하루 만에 백만원이라는 돈을 법니다. 배달 알바 한 달을 꼬박 채워야 받을 수 있는 돈을 하루에 벌었지만 청년은 기쁘지 않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마음이 휑합니다.
이런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속상하지 않겠어요. 저 역시 어렵고 불안한 대학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대학생들의 삶은 고등학교의 연장입니다. 경쟁하고 또 경쟁하고 또 경쟁합니다. 그렇게 인간성을 없애가면서 높은 스펙을 얻어 대기업에 간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떻겠어요. 연극을 보는 내내 그 사실이 너무 염려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너무 가여웠고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다
제가 감정이입을 하게 된 인물이 한명 더 있습니다. 바로 마산에서 올라와 백화점에 취업을 한 사회초년생 여성입니다. 시종일관 발랄하고 명랑합니다. 어릴 적, 백화점에 가본 후 그곳에서 일하기만을 손꼽았답니다. 백화점의 모든 것이 자기 것만 같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대요.
그러나 직장과 사회는 현실입니다. 더 이상 꿈속에 머물 여유를 주지 않지요. 이 친구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텃새에 시달립니다. 왕따를 시키고요, 사투리를 고치라고 타박하고요, 촌스럽다고 대놓고 흉을 봅니다. 명품 백 하나 없다고 멸시합니다.
조선족 여성의 경우는 또 어떻고요. 스물의 나이에 한국에 와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여성에게 한국은 따스하다가도 곧 등을 돌립니다. 남성들은 달콤한 거래를 제안하고요, 일하러 간 곳에서는 돈을 못 받고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제대로 살아보려 마음을 먹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지요. 결국 진심마저도 거짓이라 의심하고 맙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공감되었던 이유는 저도 이들과 같은 ‘서울사람들’ 중 한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거든요. 연극을 보는 내내, 대학생, 사회초년생, 조선족 처녀의 사이를 오갔습니다.
연극은 허무한 ‘희망 고문’ 따위를 남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아마 연극이 끝난 후에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나갈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잖아?" 따위의 희망 고문을 남발하는 대신, 힘들 땐 힘들다고 악을 씁니다. 그런 후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지요.
연극의 말미, 대학생 남녀가 주고받은 대화가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 마음 속에서 원하는 것, 그것에 귀 기울여 보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덧 저도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왕 살 것,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고요.
서울에서, 서울사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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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형제감독의 영화 <약속: 프로메제>를 보다
영화 <약속>은 벨기에 출신 감독 다르덴 형제의 1996년 작품이다. 이 영화 이후 <로제타>, <아들>이 연출됐다.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데, 시작이 이 정도라니 대단한 형제들 아닌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흔한 음악 하나 없고, 연출적 기교도 없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비결은 스토리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형제는 날 것 그대로의 스토리를 그저 펼쳐놓는다. 마치 실시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관객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절로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하는 건 오로지 관객들만의 몫이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긴장하고 고민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로저(올리비에 구르메)는 불법으로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는 자신의 건축 작업에 부려먹는 악덕 알선업자다. 그의 14살 된 아들 이고르(제레미 르니에르)는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악행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시거처에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던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피하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민자 남자는 건물에서 떨어지고 만다. 정신을 잃어가던 남자는 이고르에게 남겨진 부인과 아기를 돌봐줄 것을 약속해달라고 하고 이고르는 약속한다. |
[다르덴형제의 영화는 불편하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어떤 느낌이 오는가. 대번에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왜 불편할까. 영화의 소재라곤 하지만 허구가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실이기에 그렇다.
영화 속 아빠 '로저'는 이민자들을 불법 밀입국 시켜, 싼 값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 아들과 살아갈 집을 짓게 한다. 불법인 자들을 데리고 와, 자신 역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로저는 이민자들에게 '강자'다. 대부분의 강자들은 약자들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로저 역시 자신의 필요에 의해 그들을 고용하는 것일 뿐, 불필요해지는 순간 가차없이 그들을 버리고 경찰에 밀고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열 네 살 '이고르'는 로저의 아들이다. 견습생 신분으로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우지만 로저는 그의 아들을 수시로 불러낸다. 이민자들을 감시하거나 여권을 수거하는 일 등을 아들에게 시킨다. 아들의 팔에 문신까지 직접 새겨주는 로저는, 스스로를 친절한 아빠라 여기는 듯 싶다. 이고르는 티 내지 않지만, 아마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따뜻한 밥을 주고, 금반지를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빠가 있어 다행이었겠지만 또래 아이들과 밤 늦도록 놀고 싶었을 것이다. 기술을 배워 어엿한 직업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고르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가 아닌 엄마였으리라.
[완전한 악당은 없다. 모두들 약자일 뿐]
아프리카에서 불법이주한 노동자는 의식을 잃기 전 이고르에게 부탁을 한다.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데리고 온 아내와 핏덩이 아들을 지켜달라고. "약속해줄 수 있니?"라는 흑인 남자의 말에 이고르는 "약속할게요"라고 답한다. 의식을 잃은 남자를 바라보는 이고르의 눈시울이 뜨겁다.
남자를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자는 아들의 말에 아빠 로자는 "병원에 가서 뭐라고 말할 거니? 우리집에 일하는 불법노동자라고 말할 거야?"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숨이 넘어가지 않은 남자를 나무상자 안에 넣고 로자는 시멘트를 들이 붓는다. 그러곤 아들에게 "난간에서 떨어진 그의 잘못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냐. 우리는 밀치지도 않았잖아"라고 말한다. 부자는 꿀꿀한 기분을 떨쳐보려 술집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지만, 찝찝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죽은 남자의 아내는 제 남편의 행방을 부자에게 묻는다. 빚이 많아 도망갔을 지 모른다고 말해도 아내는 남편이 근처에 있을 것이며,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 결국 로자가 생각한 것은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고 유인한 후 아내를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것.
위의 줄거리까지만 읽는다면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펼쳐질지 관객의 입장에서는 몹시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다르덴형제의 영화가 늘 긴장감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들에게는 늘 곤란하고도 쉽지 않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 오는데, 그 선택이란 일반적인 게 아니어서 주인공과 관객을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로저와 이고르 부자는 불법 이주민들의 입장에선 무지막지한 악당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들 부자에게서 미움과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만 아니라면 매우 소시민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악당-선인', '가해자-피해자' 등의 이분적 법칙으로 몰고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은 평면적이지 않고 다채롭다. 다양한 본능을 드러내고 다양한 사고를 하고, 온갖 도덕적 갈등을 겪는다.
삶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다 잘 알고 있는 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악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삶에 대해 보다 기대를 갖고 있는 아들은 악한 짓을 저지르려는 아빠를 피해 도망간다. 죽은 남자의 아내에게 "우리 아빠가 너를 사창가로 팔아넘기려 했다"고 1차 고백을 하고, 아이의 삼촌이 있다는 이탈리아로 이들을 보낼 비행기편까지 마련해준다.
아빠 로저는 화가 나면 비록 손찌검을 하긴 하지만 아들을 몹시 사랑한다. 전화가 걸려온 아들에게 "그만 돌아오라"고 애걸복걸해보지만 아들은 '약속'을 지키려 애쓴다.
과연 이고르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죄책감 때문에 죽은 남자의 아내를 도와주었던 것일까. 선한 마음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이 7할이라면 나머지 3할은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초반, 이고르가 창고의 벽틈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장면은 사춘기 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드러내 보이기 충분하다. 이고르의 주변엔 어떠한 여자도 없다. 아빠의 여자와 죽은 남자의 여자만 존재할 뿐.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렇다면 이고르는 여자를 사랑한 것일까. '사랑'이라고 말하기에 그 감정은 그리 단순치 않다. 영화 속에는 이고르의 엄마가 부재하는데, 어떠한 이유로 엄마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죽었을 수가 있고, 집을 나갔을 수도 있으며 이혼을 했을 수도 있다. 왜 엄마가 없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고르의 옆에 현재 엄마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흑인 여자는 피붙이 아들을 늘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고르는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모성애의 감정을 그 여자에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를 꼬옥 껴안고 말았던 것이리라.
아빠의 추격을 따돌린 이고르는 아빠가 준 반지를 팔아 비행기 삯을 마련한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를 공항까지 마중해준다. 그날, 소년은 끝끝내 꺼내서는 안 될 두 번째 고백을 한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어. 높은 난간에서 떨어졌는데 아빠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매장해 버렸어."라고.
그 말을 들은 죽은 남자의 아내는 다시 발길을 돌린다. 화를 내지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이고르는 그녀의 슬픈 등을 쳐다보며 함께 걸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렇듯이 어떠한 결말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지금도, 이 순간도 영화의 러닝타임은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아픈 까닭]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불편한 동시에 아프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아픈 현실을 잊어버리고 즐기려는 대중들의 심리를 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의 가슴 찌릿함, 타오르는 분노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형제의 연출이 다큐와 매우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주로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비도덕적 행위도 일삼는다. 이게 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이들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지만, 안 그러면 어찌 되는가. 이러한 아이러니함이, 갈등되는 선택의 순간이 그들의 영화엔 항상 존재한다. 웃고 즐기기 위해 영화를 택하는 이들이라면 몹시 당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어렴풋 희미하지만 '희망'이 존재한다. 영화 <로제타>의 엔딩에서 주인공 로제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삶을 견디기만 했다가 처음으로 목놓아 운다. 운다는 것은 감정을 배설한다는 뜻이다. 그런 로제타에게 청년은 손을 내민다. 손은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열 네살의 이고르는 어줍잖은 어른 흉내에 제법 건방져 보이지만 마음 만은 천상 '아이'다. 아빠의 뜻을 거역하고 흑인여자를 도왔을 때, 희망은 비로소 등장한다. 그리고 고백을 했을 때 흑인 여자는 말 없이 돌아 길을 걷는다. 진실을 숨김으로써 희망을 얻느니 사실을 고함으로써 고통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 역시 사실 아니던가. 이런 날것의 현실과 마주하면서 어렴풋 희망이 생겨난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고르의 삶에도 희망이 한 줄기 생겨난 것이다. 더 이상 타락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구정물 속에서 실오라기 같은 양심을 찾아냈으니.
다르덴 형제의 나머지 작품도 모두 찾아 감상하려 한다. 다르덴 형제의 연출은 경이롭다. 이야기 역시 마음 아프지만 제대로 살아가려면 알아야만 하는 내용들이다. 영화를 오락거리로만 삼기엔 불편한 내게, 아주 딱인 영화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연출하게 될 앞으로의 모든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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