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맛’은 사라지고 ‘쇼’만 남았다.

TV 맛집의 허위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트루맛쇼’


 곧, 말복이다. 무더운 여름을 제대로 이겨내려면 몸보신 할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그래, 삼계탕이 좋겠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맛있기로 소문난 집을 찾아가서 먹어야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삼계탕 맛있는 집’이라는 글자를 입력한 후, ‘검색’ 버튼을 누른다. 수십만 개의 상호명이 화면 위로 쏟아져 내린다. 파워블로거들이 포스팅한 글을 읽어보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때 마침, 우연히 켠 TV에서 복날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뭣이라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삼계탕 집? 사람들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먹음직스럽게 먹고 있다.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맛있다고들 난리다. 방송국 게시판에 맛집 정보를 메모한 후, 시간을 내어 찾아간다. 그.런.데!!! 맛이 없다. 속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일이다. ‘TV에 출연한 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찾아갔는데 기대 이하의 맛 때문에 실망하고 돌아온 경험, 의외로 많이들 겪는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 입맛이 대중적이지 못한 것일까?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다큐멘터리 <트루맛쇼> 제작진은 “TV 속 모든 맛집은 허구”라며 “그동안 당신들은 바보처럼 속은 것”이라고 일갈한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TV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맛집은 훌륭한 요리사와 레시피 대신, 돈과 데코레이션으로 포장된 ‘가짜 맛집’이다.


  “나는 TV 속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지 알고 있다”

  <트루맛쇼>의 오프닝 멘트다. 맛집이 맛이 없다니? 언뜻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멘트는 다큐멘터리를 이끌어 가는 주제이자, TV 맛집 프로그램의 실상이다.

  제작진은 TV 속 맛집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맛>이라는 상호명의 가게를 오픈한다. 경험이 전무한 주방장과 초짜 사장을 데려다 놓고 이렇다 내세울 메뉴도 없이 ‘TV에 출연한 맛집’이 되기 위해 한바탕 쇼를 기획한다.

  쇼를 달성하기 위해 제작진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유명한 메뉴? 레시피?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돈만 있으면 된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의 맛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방송협찬대행사나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대행비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3천여만원에 달했다. 이마저도 ‘스타의 맛집’과 같은 대중스타를 동반하는 프로그램은 가격이 배로 뛴다.

  돈을 지불하고 나면 그제서야 식당 최고 메뉴가 개발된다. 이슈와 영상이 될 법한 ‘방송용 메뉴’가 개발되고, 작가는 방송용 대본을 준비한다. 촬영 당일, 식당을 메울 손님들은 인터넷 친목사이트 회원들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가짜손님들은 “와∼맛이 끝내줘요” “잊을 수 없는 맛이에요” “올 여름, 이 음식 때문에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의 진부한 말들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

  맛없는 호박 요리를 내놓으며 PD는 “호박이 전혀 달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달다고 해주셔야 해요”라며 손님에게 요구하고, 일일 아르바이트생은 손님으로서의 본부에 충실하며 완벽하게 연기를 해낸다. 영상은 “달고 단 호박 요리”라는 이름으로 편집이 되어 가정마다 전송이 되고, 음식점은 ‘호박 전문 음식점’으로 포장돼 이른바 맛집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우리나라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되는 음식점은 일년에 약 9229개 정도. 일주일에 177개가 방영되는 셈이다. 맛집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번지고 난 후, PD와 작가들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세상에 없는 메뉴를 임시로 만들어 내 방송에 내보낸다. 급조한 메뉴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찾아갔을 때, 메뉴는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맛집 브로커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당당히 말한다. 맛집에서 중요한 것은 맛이 아니라 ‘그림’이자 ‘연기’라고. 우매한 시청자들은 ‘방송에 출연한 집’이라는 타이틀만 믿고 우르르 달려올 것이고, 우리의 몫은 앉아서 돈을 버는 일 뿐이라고.


  다큐멘터리는 방송사들의 기만과 조작, 횡포만큼이나 시청자들의 태도도 잘못 되었음을 지적한다. 한 음식 평론가는 “TV 속에 제대로 된 맛집은 단 한 곳도 없다”면서 “이것은 한국에 진정한 미식가들이 없다는 증거이며, 시청자들의 조악한 질을 대변 한다”고 말한다. TV 속 맛집에 대해 누구 하나 의문을 갖지 않는 현실과 맛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미식가들의 교양과 행동에도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트루맛쇼를 강요하는 빅브라더는 누구인가?”라는 멘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할 대상은 누구일까? 공중의 전파를 통해 비즈니스를 펼쳐는 포악한 방송사 관계자의 몫일까,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마저 팔아버린 음식점 사장님들의 몫일까? 아마 영상을 끝까지 시청한 이들이라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시청자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을.
 

  말복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제 더는 인터넷과 TV를 켜지 말아야겠다. 삼계탕을 먹고 싶다면, 차라리 택시 기사 아저씨나 주인집 아저씨께 물어보려 한다. 그리곤 ‘TV에 출연한 집’이라는 타이틀이 없는 집을 찾아 푹 고운 삼계탕을 맛 봐야겠다. ‘트루(true)’의 맛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소식지 <오름과 바당> 2011년 여름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르덴 형제가 2002년에 연출한 영화 <아들>을 보았다.

형 '장 피에르 다르덴'과 동생 '장 뤽 다르덴'을 사람들은 '다르덴 형제'라 부른다.
1970년대 초, 형제는 연극과 연기 및 연출을 함께 배웠다. 그후 시멘트공장과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해서 마련한 돈으로 다큐멘터리 수십편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찍어댄 결과물의 시작은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작품에서 다큐의 냄새가 나는 건 그들의 성향이 그래서일 것이다. 연출상의 의미를 짚어보는 건 '초짜'인 내가 말하기엔 어설프지만,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만났다'라는 카피와 힐끗 소년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한데 어우러져 호기심을 유발한다.



[주인공은 아들을 죽인 소년에게 복수를 할까, 용서를 할까?]

우선,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소년원을 출소한 아이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는 5년 전 아들을 잃은 상처로 아내와도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다. 어느날 소년원에서 갓 나온 열여섯살 소년 프랑수아가 훈련센터에 새로 들어오게 되자 올리비에는 극도의 불안과 집착을 드러내며 프랑수아를 은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으로 쫓는다.

능숙하고 완벽한 올리비에의 기술을 흠모하게된 프랑수아는 목공에 열의를 느끼며 기술을 연마하고 조금씩 그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려 하지만 올리비에는 냉정함으로 일관하면서도 반면 끊임없이 증오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눈길로 프랑수아를 지켜본다.

그러던 어느날 올리비에는 목재를 가지러 가자며 프랑수아를 멀리 떨어진 외딴 목재소로 데려가는데...

이 줄거리는 '아들을 죽인 소년과의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큼 충분히 자극적이다.
"이 중년의 남자는 아들을 죽인 소년을 용서할까? 아니면 복수를 할까?"
관객들은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이 궁금증을 놓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소재를 영화화했다면 어떻게 전개됐을까?
아마 '복수'의 코드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에게 통용되는 '한'이라는 감정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복수'와 같은 특정 행위보다는 사내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의 감정선을 담담히 따라간다. 복수와 용서, 이 상반된 감정 사이에 놓여있는팽팽한 감정들을 꽉 움켜쥐는 것.



주인공 '올리비에'는 청소년재활센터에서 일하며 소년원에서 출감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친다. 일에 대한 연륜이 느껴지지만 그의 동작은 기계적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불필요한 말은 입에 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그에게 인간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올리비에는 아들을 잃었고, 부인과 이혼까지 했다. 원래부터 웃지 않는 사내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그에게 웃을 여유를 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는 몹시 불행할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는 언제부터 웃지 않는 사내가 되었을까. 아마, 아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들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보내고 혼자인 그에게 난데없이 찾아 온 부인은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아이가 아니다. 화가 난 올리비에는 "왜 하필 오늘 그 말을 하는 거냐"고 소리친다.

영화는 올리비에가 말한 '그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날'은 무슨 날인 걸까. 두 가지로 생각해본다.

첫째, 아들이 죽은 날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올리비에는 이혼했지만 부인을 미워하지도, 부인 역시 전 남편인 올리비에를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부인이 일부러 자기 아들이 죽은 날 찾아와 임신했음을 알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상처주고 말겠다는 독한 맘을 품지 않고서야.

그렇담 둘째, 올리비에가 프랑소아를 만날 날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소년원을 출소한 아이들 명단에서 아들을 죽인 범인의 이름인 '프랑소아'를 발견한 바로 그날 말이다. 초조함, 염려, 분노 등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여 괴로운 올리비에. 그런 그에게 하필 부인이 찾아온 것이다. 아들은 죽고 없는데 다른 아이를 임신했다며, 왜 하필 오늘!

글을 쓰며 두번째 추측에 좀더 확신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올리비에의 시선은 안경 너머의 프랑소아를 끊임없이 뒤쫒는다. 그의 눈에 담긴 불안과 집착은 카메라의 흔들림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관객은 그의 고민과 혼란을 느낌으로 전해받는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날, 올리비에는 화가 났을 것이다. 아들을 죽인 녀석의 얼굴을 확인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심지어 옛 부인마저 아이를 임신했다며 찾아오다니. "왜 내게 다들 이러는거야!"하는 심정이 들지 않았을까.

올리비에는 호기심 어린 마음, 분노의 마음으로 소년을 곁에 두고 목공일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어느날, 올리비에는 목재를 가지러 가자며 프랑소아를 외딴 목재소로 데리고 간다.

목재소로 향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긴장을 했다. 올리비에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던 까닭이다. 그가 혁대에서 칼을 꺼내 소년에게 겨누지는 않을까, 혹은 사고사로 위장해 그를 죽이려는 건 아닐까. 영화는 두 사람을 쫒기만 할 뿐, 어떠한 힌트도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긴장은 배가 된다.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올리비에가 프랑소아를 목재소로 데려간 건 '복수'하려는 마음에서인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계획적으로 구상하지는 못했지만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 날, 일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소년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올리비에가 들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무뚝뚝히 그 장면을 따라가고, 올리비에 역시 예의 그 표정으로 콧노래를 듣고 있지만, 아마 올리비에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내 아들은 죽고 없는데, 니 따위가 감히 콧노래를 불러?"라고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목재소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 아닐까. 어떻게든 고통을 상처를 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굳이 죽이진 않더라도.



산골에 위치한 목재소로 가던 도중 둘은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는다. 소년은 난데없이 올리비에에게 '후원자'가 되어달라 요청한다. 올리비에는 고민해보겠다고 답한다. 둘은 잠시 짬을 내 축구 게임을 한다. 그리고 다시 목재소를 향해 차를 몬다.

차 안에서, 소년은 곯아 떨어진다. 올리비에는 차를 오른쪽으로 홱 틀며 소년을 잠에서 깨운다. 잠이 깬 소년에게 "토끼를 피하려다 보니 그랬다"며 핑계를 대고 그렇거나 말거나 소년은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못 잔다"는 말을 한다.

올리비에는 그런 소년이 순간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소년에게 "왜 소년원에 가게됐냐?"고 묻는다. "도둑질을 해서"라고 답하는 소년에게 "그것밖에 없냐?"고 되묻고 결국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을 받는다. "왜 죽였냐?"는 말에 소년은 "그것을 훔치려는데 남자 아이가 막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졸랐고, 정말 죽을 줄은 몰랐다"며 말한다. 올리비에는 순간 소리를 질러버린다.

인적이 드믄 목재소에 도착한 두 사람.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지 않는다.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소년에게 "니가 죽인 아이의 아빠가 나다"라고 말한다. 소년은 도망간다. 올리비에는 "도망가지마. 아무짓도 안할거야"라며 소년을 쫒아간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아마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난 감옥에서 5년 동안 죄를 지고 나왔어요!"라고 소리치며.

올리비에와 프랑수아는 흙에 뒹굴며 몸싸움을 하더니 결국 숨을 헥헥거리며 뻗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올리비에가 먼저 일어서 목재소로 간다. 일을 마저 하고 있는데 프랑수아가 멀뚱 거리며 다가온다. 올리비에는 소년을 매섭게 쳐다보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프랑수아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지만 마저 일을 거둔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올리비에는 과연 소년을 용서한 걸까? 그래서 그냥 아무런 해를 입히지도 않고 그렇게 프랑수아를 놔둔 것일까. 영화는 올리비에의 감정을 따라갈 뿐 그에게 어떤 행동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들 역시 미뤄 짐작해볼 뿐, '끝'을 알수 없다. 사실 이 둘에게 끝은 없을지도 모른다. 올리비에의 감정은 현재 진행형으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을 것이고, 그 감정은 수시로 분노했다가 연민했다가 뒤죽박죽 덜컹 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할 테니까.

그게 인생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로제타>를 이후 이 영화가 두번째다
딱 두편 보았을 뿐인데도 연출의 성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의 영화를 본 후 발견된 몇개의 특성에 대해 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주인공을 끊임없이 쫒는 흔들리는 카메라.

'헨드헬드' 기법이라고도 하는 연출적 기법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함께 영화를 본 지인이 말하길 "영화를 보는 데 어지러워 멀미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보다 몇배는 더 헨드헬드 기법을 살려 무진장 화면을 흔들어 놓은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라 좀 덜했지만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웰 메이드 무비'를 봐왔던 이들에겐 익숙지 않은 연출방법일런지 모른다. 보통의 영화는 편안히 의자에 앉아 브라운관을 쳐다보고 있을 관객의 눈에 맞추기 마련이니까.

카메라는 마치 등장인물의 몸에 붙어 있다는 듯, 딱 밀착해 쉼없이 그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래서일까, 그가 곁눈질로 훔쳐보면 마치 그 옆에서 내가 훔쳐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고 그가 숨가쁘게 쫒아가면 지켜보는 나의 맥박도 덩달아 뛴다. 배우의 연기를 관망하는 게 아닌 그의 감정에 흡수가 된다고나 할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많은 말을 나누지도 않고, 에피소드가 대단히 튀는 것이 아닌데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는 것은 이런 연출력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말이 없는 주인공들.

극중 인물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굳이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를 통해 과거를 짐작해볼 뿐이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까발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긴장감을 유지하고 관객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

3. 갑작스레 끝나는 결말.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현재'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 미래는 '현재의 진행형'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온 현재'일 뿐. 그렇기에 현재에서 매듭짓는 방식은 그들의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서둘러 결론짓는다고 해서 매듭지어질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냥 '현재'를 덩그라니 놓여 보여주고 마는 것이다. 이런 결말이 나는 마음에 든다.

4. 영화음악 없음.

그들의 영화는 미사여구 없는 간결한 문장의 소설책 같은 느낌이다. 마치 김훈의 문장을 보는 듯한 기분. 영화음악은 커녕, 화려한 연출기법, 배경, 색감 따위의 것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 표정, 말투. 그리고 메시지가 아닐까.

다르덴형제가 최근 연출한 영화 <자전거 타는 소년>에는 음악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 변화를 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서 그 영화를 보고싶다.
 



김려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완득이>를 읽고 나서 알게 됐고 곧 그의 문체에 빠져들었다. 김려령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재밌는 글을 쓴다. 복잡하게 비비 꼬지 않아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맛깔스런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불구의 삶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

김려령의 글에는 해학이 있다. 한번 웃고 소진되어버리는 일회용 웃음과 유머가 아닌 마음에 진득이 여운을 남기는 웃음. 불구같은 세상, 불구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아픔에서 잔잔한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그녀의 글이 따스한 이유다.

   사진: 뉴시스에서 퍼왔습니다.

김려령 작가는 2년 만에 <가시고백>을 들고 왔다. 소설 <완득이>가 영화로 개봉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영향일까, 2년이라는 그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채기를 내는 '가시'와 은밀한 '고백'의 만남

뾰족뾰족 날카롭게 생겨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가시'가 은밀한 '고백'과 함께 엮이다니. 제목을 읽곤 뜨끔뜨금하고 아픈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김려령이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책은 곳곳에서 웃음이 넘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여덟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가시'를 지니고 산다. 끄집어내려 할수록 살 깊숙이 파고들고 마는 가시를 내뱉지 못해 주인공들은 상처받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가시를 독자들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그들의 상처를 처연하고 궁상맞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글을 읽다보면 극들의 가시가 언젠가는 살 위로 쏘옥 나올 것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완득이>에서도 그랬다. 다문화가정, 장애를 지닌 아빠, 불투명한 미래 등등 갑갑하면서도 답답할 수 있는 캐릭터를 김려령은 부러 궁지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바닥으로 누르지도 않고 벽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둔 채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보았더니 비로소 보였다. 완득이의 삶엔 웃음과 재미, 심지어는 희망까지도 있다는 것을. 소수와 약자로 일커러지는 이들을 극으로 몰아세우는 건, 그렇지 않은 이들이 행하는 폭력이자 구별짓기가 아닐까.

문장 속에서 과도한 연민과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그저 캐릭터의 삶 그 자체를 조망하는 김려령 작가의 문장은 눈물 쏙 빼도록 재미있고 또 슬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울면서도 웃게 되고, 웃으면서도 울게 된다.

열여덟 아이들, 그들의 '가시'는 무엇?

<가시고백>에는 열여덟살 해일과 지란, 진오, 다영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비중이 가장 크게 그려지는 이는 해일. 주인공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해일은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도둑'이라 칭할만큼 도벽(?)이 있는 아이다. 남들보다 손이 빠르고 야무지다는 걸 엄마가 칭찬해주기도 전인 이미 일곱살 때, 유치원에서 자신에게 도둑의 끼가 있단 걸 깨닫게 됐다. 허무하고도 쉽게, 남의 물건을 손에 넣고 난 후로는 그저 머리보다 앞서 손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버렸다.

같은 반 친구 지란이 들고 온 '전자사전'을 훔친 해일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곧 인터넷 장터를 통해 팔아버린다. 그렇다고 죄책감까지 팔어버린 것은 아니다. 손에 들어온 돈은 쓰지 않고 통장에 차곡 차곡 모아두는 해일에게 훔친다는 행동은 '놀이'나 '습관' 같은 것이다. 

해일은 거짓말도 제법 하지만 원래 나쁜 얘는 못 된다. 반에서도 조용하니 존재감 없이 씩 웃곤 하는데, 그 웃음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진오의 말에 따르자면 도둑놈인데도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해일은 어쩌다 '병아리 부화'를 실험한다고 거지살을 치게 되고 직접 실행에 옮기게 된다. 거짓말이 결국 병아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거짓말의 파장이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니. 해일은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마음 속 가시를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 낸다.

지란은 아빠가 둘이다. 이혼 후 재혼해 살고 있는 엄마는 이전에 짓지 않던 웃음을 띠며 행복해 한다. 지란의 친아빠는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좋아하고, 큰소리를 펑펑 치고, 술을 먹고 문자를 보내며 철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 지란은 스마트하고 매너 있는 새아빠가 있어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떼어내고 싶은 친아빠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지 못한다. 지란에게 친아빠는 '가시'와 같다. 지란은 과연 그 가시를 어떻게 몸 밖으로 끄집어 낼까.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향연.
"청년 백수도 매력적일 수 있다!"


<완득이>에서도 그러했듯, <가시고백>에서도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선, 해일의 가족부터가 '캐릭터의 바다'다. 쉽게 감동받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소시민적'인 해일의 엄마와 버럭 화를 내고 약간의 의처증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족을 믿는 해일의 아빠. 둘의 티격태격 싸움과 그 과정에서 싹트는 정은 우리네 부모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해일의 형, 해철.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그는 감정설계사가 된다며 선언하고 허무맹랑히도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살아간다. 누가보더라도 청년 백수인 해철은 '88만원 세대'다. 그 청년 백수에게도 꿈이 있고, 그 꿈은 소중하다는 걸, 먹고 사는 와중에 매력 폴폴 풍기며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라는 걸 작가는 이야기 한다. 괜히 해철을 극단의 상황에 몰고 가 찌질이로 만들어 버리는 선택을 피하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희망과 매력을!

<완득이>의 똥주 못지 않게 매력적인 선생 '용창느님'도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몇몇 말들이 순간 순간 아이들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한다. 아직 소화하지 못할 말들이어도 좋다.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고 건네는 말들, 때론 직설적이어서 과격하지만 솔직해서 좋지 않은가.

알고 보면 용창느님에게도 '가시'가 박혀 있는데 이혼남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에게 맞은 경험이 있다는 것. 그 상처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내면의 거울을 마주하며 감정들을 많이도 정돈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왕비의 거울'이야기를 운운했던 것일까.(궁금하면 책으로 읽어봐라)

특별하거나 색다른 에피소드를 담은 것도 아닌데,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주인공 시점으로 쓴 <완득이>와 달리 <가시고백>은 전지적작가시점에서 글을 써 내련간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목소리와 해석의 과도하게 담긴 문장들이 눈에 띄어 많이 불편했다. 몇몇의 비문도 보였다. 그 점만 뺀다면 역시 김려령 작가의 팬 답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은 작품이다.

김려령 작가가 다음엔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