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저자 김려령이 들고온 신작 <가시고백>
문화인/보고 읽은 모든 것2012. 2. 26. 17:30
김려령,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완득이>를 읽고 나서 알게 됐고 곧 그의 문체에 빠져들었다. 김려령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재밌는 글을 쓴다. 복잡하게 비비 꼬지 않아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맛깔스런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불구의 삶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
김려령의 글에는 해학이 있다. 한번 웃고 소진되어버리는 일회용 웃음과 유머가 아닌 마음에 진득이 여운을 남기는 웃음. 불구같은 세상, 불구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아픔에서 잔잔한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그녀의 글이 따스한 이유다.
김려령 작가는 2년 만에 <가시고백>을 들고 왔다. 소설 <완득이>가 영화로 개봉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영향일까, 2년이라는 그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채기를 내는 '가시'와 은밀한 '고백'의 만남
뾰족뾰족 날카롭게 생겨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가시'가 은밀한 '고백'과 함께 엮이다니. 제목을 읽곤 뜨끔뜨금하고 아픈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김려령이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책은 곳곳에서 웃음이 넘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여덟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가시'를 지니고 산다. 끄집어내려 할수록 살 깊숙이 파고들고 마는 가시를 내뱉지 못해 주인공들은 상처받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가시를 독자들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그들의 상처를 처연하고 궁상맞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글을 읽다보면 극들의 가시가 언젠가는 살 위로 쏘옥 나올 것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완득이>에서도 그랬다. 다문화가정, 장애를 지닌 아빠, 불투명한 미래 등등 갑갑하면서도 답답할 수 있는 캐릭터를 김려령은 부러 궁지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바닥으로 누르지도 않고 벽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둔 채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보았더니 비로소 보였다. 완득이의 삶엔 웃음과 재미, 심지어는 희망까지도 있다는 것을. 소수와 약자로 일커러지는 이들을 극으로 몰아세우는 건, 그렇지 않은 이들이 행하는 폭력이자 구별짓기가 아닐까.
문장 속에서 과도한 연민과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그저 캐릭터의 삶 그 자체를 조망하는 김려령 작가의 문장은 눈물 쏙 빼도록 재미있고 또 슬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울면서도 웃게 되고, 웃으면서도 울게 된다.
열여덟 아이들, 그들의 '가시'는 무엇?
<가시고백>에는 열여덟살 해일과 지란, 진오, 다영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비중이 가장 크게 그려지는 이는 해일. 주인공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해일은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도둑'이라 칭할만큼 도벽(?)이 있는 아이다. 남들보다 손이 빠르고 야무지다는 걸 엄마가 칭찬해주기도 전인 이미 일곱살 때, 유치원에서 자신에게 도둑의 끼가 있단 걸 깨닫게 됐다. 허무하고도 쉽게, 남의 물건을 손에 넣고 난 후로는 그저 머리보다 앞서 손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버렸다.
같은 반 친구 지란이 들고 온 '전자사전'을 훔친 해일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곧 인터넷 장터를 통해 팔아버린다. 그렇다고 죄책감까지 팔어버린 것은 아니다. 손에 들어온 돈은 쓰지 않고 통장에 차곡 차곡 모아두는 해일에게 훔친다는 행동은 '놀이'나 '습관' 같은 것이다.
해일은 거짓말도 제법 하지만 원래 나쁜 얘는 못 된다. 반에서도 조용하니 존재감 없이 씩 웃곤 하는데, 그 웃음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진오의 말에 따르자면 도둑놈인데도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해일은 어쩌다 '병아리 부화'를 실험한다고 거지살을 치게 되고 직접 실행에 옮기게 된다. 거짓말이 결국 병아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거짓말의 파장이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니. 해일은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마음 속 가시를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 낸다.
지란은 아빠가 둘이다. 이혼 후 재혼해 살고 있는 엄마는 이전에 짓지 않던 웃음을 띠며 행복해 한다. 지란의 친아빠는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좋아하고, 큰소리를 펑펑 치고, 술을 먹고 문자를 보내며 철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 지란은 스마트하고 매너 있는 새아빠가 있어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떼어내고 싶은 친아빠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지 못한다. 지란에게 친아빠는 '가시'와 같다. 지란은 과연 그 가시를 어떻게 몸 밖으로 끄집어 낼까.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향연.
"청년 백수도 매력적일 수 있다!"
<완득이>에서도 그러했듯, <가시고백>에서도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선, 해일의 가족부터가 '캐릭터의 바다'다. 쉽게 감동받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소시민적'인 해일의 엄마와 버럭 화를 내고 약간의 의처증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족을 믿는 해일의 아빠. 둘의 티격태격 싸움과 그 과정에서 싹트는 정은 우리네 부모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해일의 형, 해철.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그는 감정설계사가 된다며 선언하고 허무맹랑히도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살아간다. 누가보더라도 청년 백수인 해철은 '88만원 세대'다. 그 청년 백수에게도 꿈이 있고, 그 꿈은 소중하다는 걸, 먹고 사는 와중에 매력 폴폴 풍기며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라는 걸 작가는 이야기 한다. 괜히 해철을 극단의 상황에 몰고 가 찌질이로 만들어 버리는 선택을 피하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희망과 매력을!
<완득이>의 똥주 못지 않게 매력적인 선생 '용창느님'도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몇몇 말들이 순간 순간 아이들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한다. 아직 소화하지 못할 말들이어도 좋다.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고 건네는 말들, 때론 직설적이어서 과격하지만 솔직해서 좋지 않은가.
알고 보면 용창느님에게도 '가시'가 박혀 있는데 이혼남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에게 맞은 경험이 있다는 것. 그 상처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내면의 거울을 마주하며 감정들을 많이도 정돈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왕비의 거울'이야기를 운운했던 것일까.(궁금하면 책으로 읽어봐라)
특별하거나 색다른 에피소드를 담은 것도 아닌데,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주인공 시점으로 쓴 <완득이>와 달리 <가시고백>은 전지적작가시점에서 글을 써 내련간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목소리와 해석의 과도하게 담긴 문장들이 눈에 띄어 많이 불편했다. 몇몇의 비문도 보였다. 그 점만 뺀다면 역시 김려령 작가의 팬 답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은 작품이다.
김려령 작가가 다음엔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완득이>를 읽고 나서 알게 됐고 곧 그의 문체에 빠져들었다. 김려령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재밌는 글을 쓴다. 복잡하게 비비 꼬지 않아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맛깔스런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불구의 삶에도 희망은 있다는 것
김려령의 글에는 해학이 있다. 한번 웃고 소진되어버리는 일회용 웃음과 유머가 아닌 마음에 진득이 여운을 남기는 웃음. 불구같은 세상, 불구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아픔에서 잔잔한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그녀의 글이 따스한 이유다.
사진: 뉴시스에서 퍼왔습니다.
김려령 작가는 2년 만에 <가시고백>을 들고 왔다. 소설 <완득이>가 영화로 개봉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영향일까, 2년이라는 그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채기를 내는 '가시'와 은밀한 '고백'의 만남
뾰족뾰족 날카롭게 생겨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가시'가 은밀한 '고백'과 함께 엮이다니. 제목을 읽곤 뜨끔뜨금하고 아픈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김려령이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책은 곳곳에서 웃음이 넘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여덟 아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가시'를 지니고 산다. 끄집어내려 할수록 살 깊숙이 파고들고 마는 가시를 내뱉지 못해 주인공들은 상처받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가시를 독자들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그들의 상처를 처연하고 궁상맞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글을 읽다보면 극들의 가시가 언젠가는 살 위로 쏘옥 나올 것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완득이>에서도 그랬다. 다문화가정, 장애를 지닌 아빠, 불투명한 미래 등등 갑갑하면서도 답답할 수 있는 캐릭터를 김려령은 부러 궁지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바닥으로 누르지도 않고 벽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둔 채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보았더니 비로소 보였다. 완득이의 삶엔 웃음과 재미, 심지어는 희망까지도 있다는 것을. 소수와 약자로 일커러지는 이들을 극으로 몰아세우는 건, 그렇지 않은 이들이 행하는 폭력이자 구별짓기가 아닐까.
문장 속에서 과도한 연민과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그저 캐릭터의 삶 그 자체를 조망하는 김려령 작가의 문장은 눈물 쏙 빼도록 재미있고 또 슬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울면서도 웃게 되고, 웃으면서도 울게 된다.
열여덟 아이들, 그들의 '가시'는 무엇?
<가시고백>에는 열여덟살 해일과 지란, 진오, 다영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비중이 가장 크게 그려지는 이는 해일. 주인공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해일은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도둑'이라 칭할만큼 도벽(?)이 있는 아이다. 남들보다 손이 빠르고 야무지다는 걸 엄마가 칭찬해주기도 전인 이미 일곱살 때, 유치원에서 자신에게 도둑의 끼가 있단 걸 깨닫게 됐다. 허무하고도 쉽게, 남의 물건을 손에 넣고 난 후로는 그저 머리보다 앞서 손이 먼저 반응하게 되어버렸다.
같은 반 친구 지란이 들고 온 '전자사전'을 훔친 해일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곧 인터넷 장터를 통해 팔아버린다. 그렇다고 죄책감까지 팔어버린 것은 아니다. 손에 들어온 돈은 쓰지 않고 통장에 차곡 차곡 모아두는 해일에게 훔친다는 행동은 '놀이'나 '습관' 같은 것이다.
해일은 거짓말도 제법 하지만 원래 나쁜 얘는 못 된다. 반에서도 조용하니 존재감 없이 씩 웃곤 하는데, 그 웃음이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진오의 말에 따르자면 도둑놈인데도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해일은 어쩌다 '병아리 부화'를 실험한다고 거지살을 치게 되고 직접 실행에 옮기게 된다. 거짓말이 결국 병아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거짓말의 파장이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니. 해일은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마음 속 가시를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 낸다.
지란은 아빠가 둘이다. 이혼 후 재혼해 살고 있는 엄마는 이전에 짓지 않던 웃음을 띠며 행복해 한다. 지란의 친아빠는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좋아하고, 큰소리를 펑펑 치고, 술을 먹고 문자를 보내며 철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 지란은 스마트하고 매너 있는 새아빠가 있어 다행스럽지만, 그렇다고 떼어내고 싶은 친아빠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지 못한다. 지란에게 친아빠는 '가시'와 같다. 지란은 과연 그 가시를 어떻게 몸 밖으로 끄집어 낼까.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향연.
"청년 백수도 매력적일 수 있다!"
<완득이>에서도 그러했듯, <가시고백>에서도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선, 해일의 가족부터가 '캐릭터의 바다'다. 쉽게 감동받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소시민적'인 해일의 엄마와 버럭 화를 내고 약간의 의처증이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족을 믿는 해일의 아빠. 둘의 티격태격 싸움과 그 과정에서 싹트는 정은 우리네 부모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해일의 형, 해철.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그는 감정설계사가 된다며 선언하고 허무맹랑히도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살아간다. 누가보더라도 청년 백수인 해철은 '88만원 세대'다. 그 청년 백수에게도 꿈이 있고, 그 꿈은 소중하다는 걸, 먹고 사는 와중에 매력 폴폴 풍기며 자신의 삶에 긍정적이라는 걸 작가는 이야기 한다. 괜히 해철을 극단의 상황에 몰고 가 찌질이로 만들어 버리는 선택을 피하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희망과 매력을!
<완득이>의 똥주 못지 않게 매력적인 선생 '용창느님'도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몇몇 말들이 순간 순간 아이들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한다. 아직 소화하지 못할 말들이어도 좋다.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고 건네는 말들, 때론 직설적이어서 과격하지만 솔직해서 좋지 않은가.
알고 보면 용창느님에게도 '가시'가 박혀 있는데 이혼남이라는 것, 그리고 제자에게 맞은 경험이 있다는 것. 그 상처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내면의 거울을 마주하며 감정들을 많이도 정돈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왕비의 거울'이야기를 운운했던 것일까.(궁금하면 책으로 읽어봐라)
특별하거나 색다른 에피소드를 담은 것도 아닌데,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주인공 시점으로 쓴 <완득이>와 달리 <가시고백>은 전지적작가시점에서 글을 써 내련간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목소리와 해석의 과도하게 담긴 문장들이 눈에 띄어 많이 불편했다. 몇몇의 비문도 보였다. 그 점만 뺀다면 역시 김려령 작가의 팬 답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은 작품이다.
김려령 작가가 다음엔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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