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다르덴 형제가 2002년에 연출한 영화 <아들>을 보았다.

형 '장 피에르 다르덴'과 동생 '장 뤽 다르덴'을 사람들은 '다르덴 형제'라 부른다.
1970년대 초, 형제는 연극과 연기 및 연출을 함께 배웠다. 그후 시멘트공장과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해서 마련한 돈으로 다큐멘터리 수십편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찍어댄 결과물의 시작은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작품에서 다큐의 냄새가 나는 건 그들의 성향이 그래서일 것이다. 연출상의 의미를 짚어보는 건 '초짜'인 내가 말하기엔 어설프지만,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 '아들을 죽인 그 아이를 만났다'라는 카피와 힐끗 소년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한데 어우러져 호기심을 유발한다.



[주인공은 아들을 죽인 소년에게 복수를 할까, 용서를 할까?]

우선,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소년원을 출소한 아이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는 5년 전 아들을 잃은 상처로 아내와도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다. 어느날 소년원에서 갓 나온 열여섯살 소년 프랑수아가 훈련센터에 새로 들어오게 되자 올리비에는 극도의 불안과 집착을 드러내며 프랑수아를 은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으로 쫓는다.

능숙하고 완벽한 올리비에의 기술을 흠모하게된 프랑수아는 목공에 열의를 느끼며 기술을 연마하고 조금씩 그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려 하지만 올리비에는 냉정함으로 일관하면서도 반면 끊임없이 증오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눈길로 프랑수아를 지켜본다.

그러던 어느날 올리비에는 목재를 가지러 가자며 프랑수아를 멀리 떨어진 외딴 목재소로 데려가는데...

이 줄거리는 '아들을 죽인 소년과의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큼 충분히 자극적이다.
"이 중년의 남자는 아들을 죽인 소년을 용서할까? 아니면 복수를 할까?"
관객들은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이 궁금증을 놓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소재를 영화화했다면 어떻게 전개됐을까?
아마 '복수'의 코드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에게 통용되는 '한'이라는 감정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복수'와 같은 특정 행위보다는 사내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의 감정선을 담담히 따라간다. 복수와 용서, 이 상반된 감정 사이에 놓여있는팽팽한 감정들을 꽉 움켜쥐는 것.



주인공 '올리비에'는 청소년재활센터에서 일하며 소년원에서 출감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친다. 일에 대한 연륜이 느껴지지만 그의 동작은 기계적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불필요한 말은 입에 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그에게 인간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올리비에는 아들을 잃었고, 부인과 이혼까지 했다. 원래부터 웃지 않는 사내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그에게 웃을 여유를 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는 몹시 불행할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는 언제부터 웃지 않는 사내가 되었을까. 아마, 아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아들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보내고 혼자인 그에게 난데없이 찾아 온 부인은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의 아이가 아니다. 화가 난 올리비에는 "왜 하필 오늘 그 말을 하는 거냐"고 소리친다.

영화는 올리비에가 말한 '그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날'은 무슨 날인 걸까. 두 가지로 생각해본다.

첫째, 아들이 죽은 날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올리비에는 이혼했지만 부인을 미워하지도, 부인 역시 전 남편인 올리비에를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부인이 일부러 자기 아들이 죽은 날 찾아와 임신했음을 알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상처주고 말겠다는 독한 맘을 품지 않고서야.

그렇담 둘째, 올리비에가 프랑소아를 만날 날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소년원을 출소한 아이들 명단에서 아들을 죽인 범인의 이름인 '프랑소아'를 발견한 바로 그날 말이다. 초조함, 염려, 분노 등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여 괴로운 올리비에. 그런 그에게 하필 부인이 찾아온 것이다. 아들은 죽고 없는데 다른 아이를 임신했다며, 왜 하필 오늘!

글을 쓰며 두번째 추측에 좀더 확신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올리비에의 시선은 안경 너머의 프랑소아를 끊임없이 뒤쫒는다. 그의 눈에 담긴 불안과 집착은 카메라의 흔들림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관객은 그의 고민과 혼란을 느낌으로 전해받는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날, 올리비에는 화가 났을 것이다. 아들을 죽인 녀석의 얼굴을 확인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심지어 옛 부인마저 아이를 임신했다며 찾아오다니. "왜 내게 다들 이러는거야!"하는 심정이 들지 않았을까.

올리비에는 호기심 어린 마음, 분노의 마음으로 소년을 곁에 두고 목공일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어느날, 올리비에는 목재를 가지러 가자며 프랑소아를 외딴 목재소로 데리고 간다.

목재소로 향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긴장을 했다. 올리비에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던 까닭이다. 그가 혁대에서 칼을 꺼내 소년에게 겨누지는 않을까, 혹은 사고사로 위장해 그를 죽이려는 건 아닐까. 영화는 두 사람을 쫒기만 할 뿐, 어떠한 힌트도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긴장은 배가 된다.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올리비에가 프랑소아를 목재소로 데려간 건 '복수'하려는 마음에서인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계획적으로 구상하지는 못했지만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 날, 일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소년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올리비에가 들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무뚝뚝히 그 장면을 따라가고, 올리비에 역시 예의 그 표정으로 콧노래를 듣고 있지만, 아마 올리비에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내 아들은 죽고 없는데, 니 따위가 감히 콧노래를 불러?"라고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목재소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 아닐까. 어떻게든 고통을 상처를 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굳이 죽이진 않더라도.



산골에 위치한 목재소로 가던 도중 둘은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는다. 소년은 난데없이 올리비에에게 '후원자'가 되어달라 요청한다. 올리비에는 고민해보겠다고 답한다. 둘은 잠시 짬을 내 축구 게임을 한다. 그리고 다시 목재소를 향해 차를 몬다.

차 안에서, 소년은 곯아 떨어진다. 올리비에는 차를 오른쪽으로 홱 틀며 소년을 잠에서 깨운다. 잠이 깬 소년에게 "토끼를 피하려다 보니 그랬다"며 핑계를 대고 그렇거나 말거나 소년은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못 잔다"는 말을 한다.

올리비에는 그런 소년이 순간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소년에게 "왜 소년원에 가게됐냐?"고 묻는다. "도둑질을 해서"라고 답하는 소년에게 "그것밖에 없냐?"고 되묻고 결국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을 받는다. "왜 죽였냐?"는 말에 소년은 "그것을 훔치려는데 남자 아이가 막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졸랐고, 정말 죽을 줄은 몰랐다"며 말한다. 올리비에는 순간 소리를 질러버린다.

인적이 드믄 목재소에 도착한 두 사람. 올리비에는 소년을 죽이지 않는다.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소년에게 "니가 죽인 아이의 아빠가 나다"라고 말한다. 소년은 도망간다. 올리비에는 "도망가지마. 아무짓도 안할거야"라며 소년을 쫒아간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아마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난 감옥에서 5년 동안 죄를 지고 나왔어요!"라고 소리치며.

올리비에와 프랑수아는 흙에 뒹굴며 몸싸움을 하더니 결국 숨을 헥헥거리며 뻗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올리비에가 먼저 일어서 목재소로 간다. 일을 마저 하고 있는데 프랑수아가 멀뚱 거리며 다가온다. 올리비에는 소년을 매섭게 쳐다보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프랑수아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지만 마저 일을 거둔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올리비에는 과연 소년을 용서한 걸까? 그래서 그냥 아무런 해를 입히지도 않고 그렇게 프랑수아를 놔둔 것일까. 영화는 올리비에의 감정을 따라갈 뿐 그에게 어떤 행동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들 역시 미뤄 짐작해볼 뿐, '끝'을 알수 없다. 사실 이 둘에게 끝은 없을지도 모른다. 올리비에의 감정은 현재 진행형으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을 것이고, 그 감정은 수시로 분노했다가 연민했다가 뒤죽박죽 덜컹 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할 테니까.

그게 인생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로제타>를 이후 이 영화가 두번째다
딱 두편 보았을 뿐인데도 연출의 성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의 영화를 본 후 발견된 몇개의 특성에 대해 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주인공을 끊임없이 쫒는 흔들리는 카메라.

'헨드헬드' 기법이라고도 하는 연출적 기법이 영화를 끌고 나간다. 함께 영화를 본 지인이 말하길 "영화를 보는 데 어지러워 멀미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보다 몇배는 더 헨드헬드 기법을 살려 무진장 화면을 흔들어 놓은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라 좀 덜했지만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웰 메이드 무비'를 봐왔던 이들에겐 익숙지 않은 연출방법일런지 모른다. 보통의 영화는 편안히 의자에 앉아 브라운관을 쳐다보고 있을 관객의 눈에 맞추기 마련이니까.

카메라는 마치 등장인물의 몸에 붙어 있다는 듯, 딱 밀착해 쉼없이 그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래서일까, 그가 곁눈질로 훔쳐보면 마치 그 옆에서 내가 훔쳐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고 그가 숨가쁘게 쫒아가면 지켜보는 나의 맥박도 덩달아 뛴다. 배우의 연기를 관망하는 게 아닌 그의 감정에 흡수가 된다고나 할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많은 말을 나누지도 않고, 에피소드가 대단히 튀는 것이 아닌데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는 것은 이런 연출력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말이 없는 주인공들.

극중 인물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과거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굳이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대사를 통해 과거를 짐작해볼 뿐이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까발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긴장감을 유지하고 관객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

3. 갑작스레 끝나는 결말.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현재'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 미래는 '현재의 진행형'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온 현재'일 뿐. 그렇기에 현재에서 매듭짓는 방식은 그들의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서둘러 결론짓는다고 해서 매듭지어질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냥 '현재'를 덩그라니 놓여 보여주고 마는 것이다. 이런 결말이 나는 마음에 든다.

4. 영화음악 없음.

그들의 영화는 미사여구 없는 간결한 문장의 소설책 같은 느낌이다. 마치 김훈의 문장을 보는 듯한 기분. 영화음악은 커녕, 화려한 연출기법, 배경, 색감 따위의 것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 표정, 말투. 그리고 메시지가 아닐까.

다르덴형제가 최근 연출한 영화 <자전거 타는 소년>에는 음악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 변화를 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서 그 영화를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