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사이에서(Between)

 

감독: 이창재

출연: 이해경

장르: 다큐멘터리

 

 

 세상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망상'이나 '거짓'따위로 치부되지만 웃어 넘겨버리기엔 너무나 진실된 것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교, 그 중에서도 '샤머니즘'일 것이다.

 인간과 신, 저승과 이승, 현실과 비현실 그 사이에 서있는 사람들. 바로 신의 부름을 받고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이 영화는 무당들의 삶을 꾸밈이나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로, 지난 5천여년간 평범한 이들의 삶에 힘을 보태는 조업자로 때로는 신과 저주받은 사제 사이로 지내야만 했던 무당들의 삶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원했던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닌 그들의 삶은 그렇기에 '숙명'따위로 표현될 수밖엔 없다. 팔자가 그러한 걸, 누굴 탓해야 좋을까. 스무여덟 꽃다운 나이에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처녀와 신의 부름을 거역했다가 15년 동안 뇌종양으로 병투병을 했던 여자, 그리고 8살 어린 나이에 뭔지 모를 기운에 이끌려 한 쪽 눈을 잃는 등 기구한 삶에 맞닥뜨린 꼬마아이 등. 이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옴을 느낀다.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못하고 평생 남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무당. 그들에겐 남들에게 없는 하나의 감각이 있다. 바로 신과의 교감이다. 이들은 신의 부름을 온 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곤 한다. 이러한 능력은 받아드리고 싶지 않아도 받아야만 하는 삶의 굴레와도 같다. 갸냘픈 인간의 몸으로 받은 신의 기운이 너무도 버거워 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살풀이를 해야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귀신들의 말을 인간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과연 귀신일까, 인간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굴레란 얼마나 버거운가.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뜻대로 될 수 있는 삶이 아니기에 억울하고 기구하다. 세상에 태어나 눈 감을 때까지의 삶이 이미 예견된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리도 아둥바둥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견된 삶을 관망하지 못하고 현실에 급급해 싸우고, 헐뜯고, 아둥바둥 자신을 잃어가고.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

 

 증명할 수 없는 것. 증명될 수 없는 것. 하지만 분명히 사실인 것.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시시콜콜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무당들의 일상을 통해 설명할 뿐이다.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기운에 대해. 그리고 분명 그들을 통해 그 기운은 존재하고 있다는 걸. 참으로 가슴아프고 기구한 삶이다.

 

 



바그다드 까페(Bagdad Cafe, 1998)

 원제: Out of Rosenheim
감독: 퍼시 애들론
주연: 마리안느제게브레히트, CCH파우더


 횡량한 사막 한 가운데 차 한대가 멈춰선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는 사막 위에서 먼지를 폴폴 일으키며 티격태격 다툰다. 몇 분이 지났을까, 볼 한가득 불만을 넣은 여자는 차에서 내리고 남자는 여자의 짐을 던져버린다. 사막 위에 처량하게 버려진 그녀의 이름은 자스민. 땡볕이 내리쬐고 현기증이 날 만큼 아득한 길(영화 '아이다호'에서 리버피닉스가 기면증을 호소하던 그 길이 생각나는 이윤 뭘까)을 바라보며 자스민은 한 숨을 길게 내쉰다. 가도 가도 끊없는 길을 걸어가며 줄줄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본다. 그 때 흐르는 음악, 유명한 OST 'calling you'. 나른하면서도 건조한 선율이 횡량한 사막 위의 모래와 함께 흩날린다. 마음 속 깊숙이 숨어있는 원초적인 그리움을 끌어내는 듯 애절하고 메마른 음색은 자스민의 긴 걸음을 묵묵하게 지켜보는 듯 하다. 


   온 몸 가득 퉁퉁하게 살이 잡힌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곳은 허름한 바그다드 모텔. 모텔 옆에서 손님이 거의 없을 듯 보이는 주유소가 있고 카페가 있다.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카페의 여주인 '렌다'와 눈이 마주친다. 눈물을 훔치고 있는 까만 얼굴의 렌다를 바라보며 자스민은 원주민들에게 잡아먹히는 무서운 상상을 해본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 때문일까. 렌다 역시 자스민이 탐탁치는 않다. 손님이어서 받아주기는 하겠지만 빨리 떠났으면 하는 심정이다.

  무능력한 남편과 말 안듣는 두 자식때문에 신경질이 극도록 치밀어 오른 '렌다'는 꽤나 억척스럽다.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가장 같다. 남편과 다툰 후, 화가 난 남편이 짐을 싸 집을 나서자 렌다는 "꺼져버려! 내가 눈물 한방울이라도 흘릴 줄 알고!"라고 악다구니를 퍼붓더니 그가 떠난자마자 눈물을 흘린다. 허름한 건물 앞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렌다의 모습은 처량해 보인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그녀이기 때문에 자스민에게 방을 내주면서도 "짐은 스스로 들고 가라. 여긴 고급 호텔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말을 덧붙인다.

  방에 도착한 자스민은 가방을 열고 짐정리를 한다. 남편의 옷가방을 갖고 왔는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이런 저런 옷가지들을 벽에 걸어두고 그녀는 바그다드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에는 인디언계로 보이는 종업원 남자와 나이가 든 남자, 그리고 피아노를 두드리는 렌다의 아들, 사람들에게 문신을 파주는 예쁘장한 젊은 아가씨가 있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자스민은 서글픈 듯, 어설프게 앉아 있다. 렌다는 자스민을 신경쓸 겨를 없이 신경질 적인 어조로 남편이 주어온 커피포트를 내다 버리라고 주문한다, 그녀에겐 그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낯선 것은 모두 의심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렌다가 잠시 집을 비운 새, 자스민은 이 곳 저 곳 대청소를 한다. 높은 지붕에 올라가 간판도 닦고(포스터 참고) 사무실의 어지러운 서류들도 정리하고 깔끔하게 정돈한다.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던 자스민은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며 되려 화를 낸다, "당신이 뭔데 내 것에 손을 대냐"며 불쾌한 내색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침울해진 자스민은 미안하단 말을 건낸 후 방에 들어가 선물로 받은 마술도구를 장난삼아 만지작 거린다. 외롭게 남겨진 방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술을 하는 것 밖엔 없다.


  자스민의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상냥하고 친절하며 악의없는 그녀의 행동은 렌다의 식구들의 마음을 열어 놓는다. 렌다의 사춘기 딸의 마음을 얻은 자스민은 그녀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아노 선율을 듣고 훌륭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자스민에게

렌다의 아들 역시 마음을 연다.

  마지막까지 툴툴거리는 이는 '렌다'다. 자신의 가족들을 선동하는 저 이상한 여자의 정체는 뭘까, 말 끝마다 "젠장"거리며 자스민에게 싫은 기색을 내뱉는다.

  하지만 렌다 역시 딱딱히 굳은 심장은 아니였기에 서서히 자스민에게 마음을 열고 마술을 익힌 자스민은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마술솜씨를 선보인다. 호응이 좋자, 카페는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찾고 자스민은 카페 식구들과 함게 손님들에게 마술쇼를 선보인다, 

 마술처럼 하나가 된 바그다드 가족들. 그들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보이지 않는 일체감을 느끼며 교감한다. 여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삶은 메마른 사막 위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다.

  명작 중의 명작. 스테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바그다드 카페'. 긴- 심호흡을 하듯, 잔잔하고도 숨이 차지 않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두번째 사랑 (never forever)

(김진아 감독/베라 파미가, 하정우)

 

 

 

  이 영화의 원제는  'never forever'다. 해석을 하자면 "영원한 것은 절대 없다" 정도 일텐데, 해석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해서인지 한국어판에는 '두번째 사랑'으로 제목을 달리했다.

외국에서 영화공부를 했다는 '김진아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외국에서 모든 촬영을 마쳤다. 여주인공 역시 외국인으로 한국영화에서는 전례가 드믄 케이스다. 참고로 여주인공 '베라 파미가'는(난 왜 이 부분에서 자꾸 '개미 퍼먹어'가 생각날까?^^;) 영화 '디파티드'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여자다.(역시 이쁘구나...쩝)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은 아이를 애타게 원하는 여주인공 소피가 남편과 같은 국적의 불법체류 한국인 지하를 통해 정자를 제공받고 아이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불법체류자인 지하는 ‘차이나타운’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로 여자친구를 외국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불임클리닉’에 한 회에 5달러씩 정자를 팔기 위해 신청하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그마저도 거절당하고 그는 결국 한 회당 300달러를 준다는 소피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드리고 만다. 결국 소피는 임신이 되고 둘 사이의 ‘비지니스 적’인 만남은 ‘사랑’의 단계로 발전한다. 임신을 한 뒤에도 틈틈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둘은 혼란스러워 한다. 그래도 몸과 마음이 이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은 소피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 하지만 소피는 힘들게 얻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남편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는 어린 아들과 함께 만삭인 몸을 이끌고 지하의 방에 걸려있던 바다 풍경 앞에 서있다. 소피가 남편을 떠나 지하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남자를 만났는지 아니면 남편과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피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략 내용은 이러하고, 이 영화를 통해 내가 느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왜 이토록 사람들은 혈연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일까’하는 의문과 둘째는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임 부부의 슬픔’ 따위의 것들이다. 첫째의 경우, 우리나라에 만연하고 있는 ‘핏줄’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연관될 수 있다. 왜 하필 ‘나와 같은 피가 섞인 아이’여야만 하는가. 불임부부를 위해 ‘입양’이라는 제도도 있지 않은가. ‘핏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정자를 사고파는’ 비정상적인 관계까지 형성하게끔 한 것이 아닐까. 사랑의 결실로 이뤄지는 ‘임신’의 과정에 경제적 논리가 개입될 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미학적 행위’가 아닌 ‘기계적 행위’로 인식된다. 몸속에서 피를 뽑듯, 정자를 뽑아 난자와 결합시키면 되는 일이다. 사랑의 감정도, 흥분도 배재된 채 그저 일정한 피스톤 운동만을 할 뿐이다. 사랑의 결실인 ‘임신’과 ‘출산’이 ‘아이’를 얻기 위한 기계적 행위로만 인식될 때, 섹스는 무미건조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그저 똑같은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니. 어찌됐든, 혈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수단과 목적을 상실한 채로 표류하고 있는 한, 이러한 문제는 계속되지 않을까. ‘가족’이 혈연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다양한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좀 더 유연하고 넓은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는 사회문제가 돼버린 ‘불임부부’에 대한 단상. 이 땅의 많은 부부들 중에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예전에 잡지를 통해 읽었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예상했던 것 이상의 통계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달라진 식습관, 패스트푸드의 남용, 환경호르몬의 증가로 인해 우리 몸은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음식, 캔, 플라스틱 등 입을 통해 들어오는 무수한 환경호르몬 입자들은 우리 몸의 정자를 기형으로 변형시키고 자궁벽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리하여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정자와 난자는 서로를 애타게 원하여도 힘이 없어 만날 수 없고 팔 다리가 없어 서로를 끌어안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불임’이 아닐까 한다.

어찌됐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또 한번 하게 됐다. 결혼을 한 이들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겪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 말에 대략 공감을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