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인디애니박스 <셀마의 단백질 커피>

최근 <돼지의 왕>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독립영화계에 바람을 일으키며 사람들에게 신선한 잔혹함(?)을 안겨주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전, 단편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사랑은 단백질>이다.

하나만 달랑 개봉할 순 없으니 다른 단편 애니메이션 두편과 함께 짝을 맞춰 장편분량으로 러닝타임을 맞췄고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했다.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연상호 감독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나의 관심은 오로지 최규석 만화가에게서 비롯됐다. 그가 그린 만화라면 항상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규석 만화가를 알고 있나요?









최규석. 197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으며, 상명대 만화컨텐츠학부를 졸업했다. 그가 펴낸 첫 단행본은 <아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로 한국 만화 계에 당돌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히치스러우면서도 정감 있는 그의 그림 속에는 이 사회의 소수자들이, 약자들이 담겨 있었다.

 

이후 경향신문과 한겨레 신문에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원주민>와 같은 작품을 연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탄탄히 만들어 간다. 5.18 광주항쟁 이야기를 담은 <100도씨>를 펴냈고, 작년엔 <울기엔 좀 애매한>이라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펴냈다.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시각으로 그려내는 최규석의 만화가 나는 참 좋았다. 그가 펴낸 작품들은 다 읽을 정도로 그의 팬이 되었다.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의 합작품 <사랑은 단백질>

단편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은 최규석 만화가의 작품이 원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위한 장르라 말한다. 그렇지만 <은하철도 999>나 <스머프>, 혹은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에서 만든 만화영화에서 알 수 있듯, 애니메이션은 때로 기존 영화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명확하다.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만화영화가 아름답고, 희망적이고, 깨끗한 이야기만 담아야 한다는 편견은 버리는 게 좋을 듯 싶다. (버리기 싫다면 헐리우드식 애니메이션을 보세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등)


귀엽고 앙증맞은 그림, 상상력을 발휘한 등장인물에만 집중한다면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놓칠 수 있다. 가끔씩 살을 파고드는 무서우리만큼 섬뜩한 설정들. 이토록 재밌고 영리하고 섬뜩한 애니가 과연 있을까.


<원티드> 태풍이 휩쓸고간 자리, 무능력한 위정자


이 영화, 실은 제목이 너무 난해하다. <셀마의 단백질 커피>!!!! 잉,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단편 3개의 내용을 요약한 제목이었다.

<원티드>는 평화롭고 나른한 마을에 어떤 무서운 노파가 몰고온 태풍으로 고난에 빠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노파는 태풍 '셀마'를 의미한다. 지명수배자로 일컬어지는 '셀마'를 통해 한국의 정치상황을 빗댔다.

이를테면 이렇다. 태풍으로 마을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뗏목에 의지해 바다인지, 마을인지 모를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닌다. 그때, 경찰청장(혹은 동장) 비스므리한 권력을 쥔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이라 생각하며 환호하지만, 그는 시간이 없다며 구호물품만을 던지고 가버린다. 박스 안에 든 것이 음식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곧 절망한다. 박스 안에는 인형들만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실리는 따지지 않고 보여지는 것만, 절차만 중시하는 정치인들.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주민들과 그들의 불신이<원티드>에 아주 잘 담겨 있다.

<사랑은 단백질> 치킨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라

<사랑의 단백질>은 세상의 모든 치킨들이 지니고 있는 사연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분간 닭은 입에도 대기 싫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은 닭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고?

그러니까, 영화는 자취생 청년 셋(재호, 경순, 홍찬)이 돼지 저금통을 탈탈 털어 치킨을 배달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잠시 후, 족발집의 돼지가 대신 닭을 들고 배달을 오고, 돼지를 뒤늦게 따라온 닭사장은 배달된 치킨이 바로 자신의 아들 '닭돌이'라며 대성통공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청년들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 한 청년은 식욕을 잃어버리고 닭 사장의 마음에 동화돼 그저 눈물만 흘린다. 그러던가 말던가 다른 청년은 닭돌이의 다리를 쫙 찢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먹는다. 나머지 청년 하나는 미적미적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닭을 먹는다. 그리곤 눈치 없이 굴던 친구를 타박한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대사 하나. 시종일관 눈치 없이 입맛만 다시고 침 흘리던 친구 재호에게 누군가가 "너는 눈치가 없어서 참 좋겠다"라고 말한다. 남이 아프던 말던, 누가 죽던 말던 오로지 자기 배 채우는데 관심이 있는 녀석. 본성이 나쁘다, 착하다의 문제가 아닌 '눈치'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잉여인간. 과연 우리는 재호를 비난하고만 있을 수 있을까. .

비록 애니메이션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면 나는 과연 어떤 청년처럼 행동하게 될까. 그것을 생각하며 애니를 본다면 재미는 두배가 될 것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 커피자판기, 사랑에 빠지다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만화적 상상력이 깊이 가미된 영화다. 무림제일검이라 불리던 검객 진영영은 강적과의 대결 끝에 죽고, 소원대로 강철로 환생한다. 그런데!!! 하필 커피자판기다. 가슴에서 따뜻한 커피를 만들어내고, 술을 먹으면 동정심이 많아지는 여자 혜미와 사랑에 빠진다.

자판기와 사람의 사랑이라. 정말 재밌고도 깜찍한 상상력이다. 커피자판기는 저녁만 되면 사람으로 변한다. 커피자판기와 인간의 사랑.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다룰 수 없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펼쳐지는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판기를 타고 혜미가 그 위에 앉아 하늘을 나는 장면, 참 예쁘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지브리스튜디오에서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의 한장면이 생각났다. 

주인공이 둘다 단발머리라는 점, 스커트를 입었다는 점, 발랄하다는 점이 같다. 다른 점은 혜미는 자판기를 타고 날아다니고 키키는 마녀답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것.

지금도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가면 꼭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곤 한다. 때론 난해하고 때론 대책없이 귀여운 다양한 작품을 만나며 그때마다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꿈과 희망 대신, 현실에 대한 직시와 잠시 쉬어갈 여유 같은 것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름답다, 그러니 아름답게 살아라"가 아닌 "현실은 시궁창이다. 새삼스러워 말고 시궁창 같은 곳에서 인간답게 살아봐라"라는 제법 아프고 능청스럽게 삶에 대한 교훈과 철학을 주는 애니메이션. 이 작품을 꼭 봐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