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나는 어릴 적, 글 쓰는 걸 매우 좋아하는 아이였다.

 

형편이 좋지 않아 학창시절 대부분을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내가 자란 동네는 시골 바닷가 마을이었다. 지금은 '올레길 코스' 중 하나가 된 곳(내 고향은 제주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한글을 배웠다. 언니는 나보다 7살이 많았고, 오빠도 5살이나 많았는데 한번도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한글을 몰랐지만, 할아버지는 한글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게 배워주지 않았다. 아마 '교육열'이 없는 분들이셔서 그런가보다. 한글이라곤 내 이름 세 자 쓰는 게 전부였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글을 배웠다. 다행히 한글을 금방 익혀, 받아쓰기 시험이 두렵지 않았다. 글씨도 이쁘게 써서 칭찬도 많이 들었다. 물론, 연필잡는 법이 이상하다고 지적은 많이 받았지만, 선생님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항상 내 식대로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아직도 희안하게 연필을 잡는다.

 

학교 다니면서 가장 즐거웠던 건 '일기 쓰기' 였다. 저학년 때 했던 '그림 일기'를 비롯해 고학년이 되어 시작한 '그냥 일기'를 쓰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우리 남동생은 일기쓰는 걸 싫어해서 저녁마다 부모님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당시 나는 그런 남동생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기쓰는 게 왜 싫어? 얼마나 재밌는데?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대신 써줄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내 일기를 아이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적인 이야기를 감히!' 이러면서 '발끈'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때 난 참 행복했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때 애정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3학년이 되어서 전학을 갔는데, 그 학교는 1반만 있는 작은 학교였다. 거기에서도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내 일기를 모범으로 아이들에게 읊어주곤 했다. 당시 3학년 담임이셨던 박영숙 선생님은 내 글을 참 좋아했다. 방과후에 혼자 학교에 남게 해, 글쓰기 지도를 해주셨다. 내가 쓴 동시가 좋다며 함께 다듬는 작업을 했고, 그 동시가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나를 예뻐해주는 선생님을 나도 아주 좋아했다.

 

4학년에 올라가면서 담임선생님이 바뀌었다. 그 선생님은 굉장히 쌀쌀맞은 분이셨다. 내 일기를 읽어주는 일도, 다른 누구의 일기를 읽어주는 일도 없었다. 일기지도를 따로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스승의날에 우리들이 보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몰인정한 여자였다. 당번이었던 나는 짝꿍과 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선생님 쓰레기통에 우리들 편지가 담겨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그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에 쓰고 싶지도 않다.

 

나의 일기쓰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함께 졸업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돌입한 나는, 친구들과 '교환일기장'이라는 걸 썼다. 혼자만의 일기는 다이어리에 조그맣게 기록하곤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일기를 썼다면 참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그 시절이 덜 외로웠을텐데.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당시의 나는 자주 상처받았고 외로웠다.

 

언제부턴가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이 사라졌다. 가족 중 누군가가 버린 모양인데, 아마 외숙모로 추정된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악한 감정을 갖고 살았다. 동화를 쓰려는 내게, 어린 시절 일기장이 없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그 일기장들이 남아있었다면, 큰 재산이 됐을텐데.

 

 

제주도 시골집에 갔다가 위의 상장들을 발견했다. 거의 초등학생 때 받은 상장이다. 나보다 7살이 많은 언니는 나와 싸우면 보복(?)으로 내가 받은 상장을 마구 찢곤 했다. 아마 셈이 나서 그랬을 것이다. 언니의 행동에 나는 더욱 교활하게 복수했다. 바로 언니의 교과서를 마구 찢어버린 것이다. 꽤나 살벌한 전쟁이었던 셈. 지금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다. 그래도 그땐 언니를 꼭 이기고 싶었다!!!

 

상장의 팔할은 글짓기 상이다. 선행상도 한 장인가 눈에 띄고, 독후감 상도 있고, 그림그리기 상도 있다. 그래도 가장 많은 건 글짓기 상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글쓰는 걸 좋아했다. 맞아, 그런 아이었다. 항상 뭐든 쓰는 아이었다. 한때 시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기자가, 지금은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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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는 매우 다른 영화 <은교>

 

   개봉 전부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영화 <은교>를 드디어 보았습니다. 배우 박해일의 열혈 팬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관심 갖지는 않았습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영화 안 보신 분들, 무시무시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안심하셔요.)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다

 

  원작이 되는 책을 먼저 읽은 후 영화를 보면 실망이 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감동을 영상이 따라가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아파트>를 비롯한 강풀 시리즈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공지영의 <도가니>는 영화로도 아주 잘 봤고, 김려령의 <완득이> 역시 신나게 봤으니까요. 이 영화 <은교>를 앞선 두 종류의 영화에 빗대자면,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자’입니다. 실망이 좀 더 컸거든요.

 

 

 

 

  박범신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동영상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예고편을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박해일이 원작 소설을 읽어주는 동영상을 보고 그만 문장에 ‘뿅’ 갔습니다. 굵고 차분하고 또렷한 배우의 음성이 문장을 살아 숨 쉬게 했습니다. 소설을 귀로 듣는 다는 것,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더라고요.

 

 

  주말 동안 뚝딱 완독했습니다. 상당히 아름답더군요. 박범신 작가의 책은 처음 읽는 거였어요. 그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은 게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문장에 푹 빠진 상태에서 한껏 기대해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소설에 대한 평은 따로 올리겠습니다.)

 

 

소설에서 모티브만 따왔을 뿐

영화 <은교>는 소설과 매우 다른 영화.

 

  감히 영화를 평론할 깜냥이 제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영화 평론 과정’ 수업을 돈 내고 수강하다가 중도하차 했겠어요. 영화를 평론하려면 굉장히 똑똑하고 철학적이며,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야겠더라고요. 제겐 어림없는 일이죠.  그러니 이 점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이 글은 평론이라기 보단 ‘사적인 느낌’입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와 매우 다릅니다. 소설 <은교>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으로 이뤄졌습니다. 시인 이적요가 죽고 나서 일 년 후, 변호사는 “내가 죽은 후 일 년 뒤 공개하라”는 유언에 따라 죽은 시인의 노트를 읽어 내려갑니다. 그 안에 은교와 제자 서지우와의 관계, 시인이 느꼈던 감정의 동요, 놀라울만한 사실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소설은 변호사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다 이적요의 노트의 내용을 공개하며 이적요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소설은 자유자재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스릴러 책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생기고 뒷이야기가 매우 궁금해지는 까닭은 그러한 구성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의 전개방식과 다릅니다. 하긴 상상해보건대, 그러한 설정을 따랐다면 굉장히 산만하고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변호사가 등장해서 낡은 노트를 꺼낸다.→노트를 읽는다→이적요가 등장한다→이야기가 전개된다→변호사가 다시 등장하며 현재로 넘어간다’. 얼마나 산만하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영화는 ‘이적요의 노트 속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고생 은교를 어떻게 알게 됐고, 각별히 아꼈던 제자 서지우와는 어떻게 갈등을 겪게 되는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일흔 살 노인과 여고생의 사랑’ 정도로 정의 내리려는 것 같습니다. 혹은 ‘여고생을 둘러싼 일흔살 노인과 제자와의 삼각관계’로 말예요. 충분히 자극적이고 대중적이고 재밌기까진 하지만 이렇게만 보기에는 뭔가가 아쉽습니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적요에게 은교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사랑하는 여인? 아니면 소설에 나와 있듯 나의 처녀? 글쎄요, 무엇으로도 정의내리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갈래들이 줄기를 뻗어 뒤엉켜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느낀 바로는 이렇습니다. 이적요는 은교를 성모마리아와 같은 ‘동정녀’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순결무구한 존재로요. 동정녀 성모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정녀지요. 그런 ‘절대 순결’의 존재로 은교를 여긴 게 아닐까 해요.

 

  그렇기에 은교를 함부로 만질 수도 훼손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리도 믿었던 서지우에게 비록 훼손당했다 하더라도 은교는 이적요에게 ‘영원한 처녀’입니다. 시에서 훼손할 수 없는 절대성, 정신적 가치처럼 말예요.

 

  하여간 이적요가 은교에게 갖는 감정은 복잡다단합니다.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가 멀어지고 갈등하고 의심하게 되는 과정 역시 ‘질투 때문’이라 단정 지으면 상당히 곤란합니다. 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납득하실 겁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이들의 감정과 갈등이 다소 단순하게 그려집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에피소드 역시 소설과 매우 다릅니다. 하긴,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이야기를 전개시켜야하니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연출을 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이건 소설이 아닌 영화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영화 <은교>를 소설에서 인물설정과 제목만 따온 별개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영화를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도가니> 같은 경우엔 원작소설과 80% 이상이 내용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은교>는 아닙니다. 정지우 감독의 재능과 판타지를 엮은 아주 다른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참 많네요. ‘이건 소설과 달라. 영화는 그냥 영화야’라곤 해도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문장의 웅장함과 힘이 영상으로도 고스란히 재현되길 바라는 ‘팬심’은 어쩔 수 없겠지요.

 

 

젊음이 그저 얻어졌듯, 늙음은 죄가 아니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들이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문장은 영화에도 나옵니다. 이적요가 서지우의 ‘이상문학상’ 시상식에 가서 축사를 하지요. 그때 그 대사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이 문구에 밑줄을 그어뒀습니다.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감독 역시 영화의 주제를 이 문장에서 얻었나 봅니다. 늙음에 관한 편견, 그것이 주는 슬픔. 그리고 늙은 것은 범죄이거나 죄가 아니라는 것, 자연의 결과라는 것. 바로 이 문장에 집중해야만 이적요의 감정선을, 영화의 결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은교를 향한 남성 판타지를 한껏 끌어올리느라고요. 그래서 아마 몇몇 사람들이 이 영화를 외국 작품 <롤리타>와 연관 짓나 봅니다.

 

 

‘은교 앓이’ 여배우 김고은의 발견

 

 

 

  여배우 김고은, 정말 이름처럼 곱더라고요. 남자들이 요새 ‘은교 앓이’ 중이라던데, 십분 이해합니다.

 

  소설 속의 은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거나 굉장한 미인상이 아닙니다. 변호사는 은교를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다만, 눈빛은 깊다나요? 이런 캐릭터를 살리기란 참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은교는 김고은에게 고스란히 투영됐습니다.

 

  살갗이 비칠 것 같은 투명한 피부에 군살 없는 미끈한 몸매, 잘록한 허리, 긴 팔다리 등의 몸매는 물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외모까지도요.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또렷한 요즘의 여배우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 김고은이 평소 존경한다는 ‘전도연’ 같은 배우로 대성해주길 기대해봅니다.

 

  파격적인 노출까지 감행했지요.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다고 하네요. 김고은을 아끼는 은사는 이런 말을 했다지요. “영화를 찍는 순간, 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너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모쪼록 배우 김고은이 좋은 작품을 만나, 오래 오래 연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무열은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로 소문 나 있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좀 부족한 느낌입니다. 박해일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김무열 특유의 아우라는 느껴지지 않았지요. 아마 영화에서의 비중이 큰 편이 아니어서 그런가 봅니다. 김무열도 자신에게 딱 맞는, 비중있는 역할을 만난다면 신들린 연기력을 펼치겠지요. 뭐, 아직 젊으니까요.

 

  그리고 박해일. 8시간이 넘는 분장 끝에 노인으로 변신했다고 하지요. 영화 초반에 공개되는 몸은 대역이라고 하네요. 얼굴은 그렇다 치고 몸매까지 분장으로 감출 수는 없었을 거예요. 박해일의 얼굴은 괜찮았는데 목소리가 매우 어색했어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 목소리를 흉내 내듯 굵고 거슬리더라고요.

 

 

 

 

  소설에서 이적요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노인으로 나옵니다. 180이 넘는 장신에 마르긴 했지만 체격도 다부지게 표현됐지요. 이런 설명대로라면 극중 박해일의 건장한 체격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아마 소설 속의 이적요가 실제 인물로 부활한다면 눈빛이 형형하고 건장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었을 거예요. 하긴 기존의 젊은 배우 중 이적요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박해일 밖엔 없을 거란 생각도 해봅니다.

 

  정지우 감독이 그랬다네요. “다음번에 <은교>를 한 번 더 찍는다면 진짜 70대 노인을 출연시키고 싶다”고요. 감독님께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감독님, 다음이란 없어요.”라고요.

 

  한 마디 더 붙이겠습니다. “감독님 <해피엔드> 같은 작품 다시 만들어 주세요, 네?” 정지우 감독을 계속 지켜보렵니다.

 

 

 

 

 

[기타]

 

 

영화 <은교> 예고편입니다.

 

 

 

정지우 감독, 김고은, 박범신 작가(박범신 작가 멋지네요 흐엉)

 

 

 

 

 

박원순 시장도 보았다는 연극 <서울사람들>

 

  연극 '서울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앵콜공연이라네요. 친구가 당첨이 됐다며 함께 보러가자고 권했습니다. 제목만 들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연극 서울사람들 참 좋다더라. 박원순 시장도 봤대”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역시 유명인을 동원한 마케팅은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연극을 보자마자 왜 이 연극이 앵콜공연까지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따뜻합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되뇌이게 되는 연극입니다.

 

서울에서 발 딛고 사는 '서울사람들'

 

  연극에서 ‘서울사람들’은 서울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토박이들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의 삶을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그립니다.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습니다. 아참, 조선족 처녀도 있습니다. 이들의 연령대는 2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합니다.

 


  연극은 군데 군데 웃음의 요소가 들어있지만, 때때로 서글프고 날카롭습니다.

  대학생 친구 두 명의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감 있고도 와 닿습니다.

 

  졸업 전 취업을 목표로 학교를 휴학하고 고시원에서 토익을 비롯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여대생은 굉장히 히스테릭합니다. 작은 소음도 못 견딜 정도로 날이 서있고,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다 옆방에 살고 있는 청년이 대학교 동아리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순수하면서도 무모한 청년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대학생, 취준생, 조선족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

 

  청년의 고향은 제주입니다. 제주사투리를 굉장히 리얼하게 쓰는 모습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고향이 제주거든요.(배우 고향이 제주도라고 80% 확신합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닙니다. 그 무시무시한 등록금 때문에 청년은 패스트푸드점 배달 알바를 합니다. 방세는 몇 달 밀려 방문 앞엔 빨간 딱지가 붙었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수업을 빠지기 일쑤입니다.

 

 

 

  그런 청년을 옆방 친구가 몰아세웁니다. “차라리 대출을 받고 대학 먼저 졸업해! 지금 우리가 할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토익도 해야지, 학점도 받아야지, 스펙을 쌓아야 한다구!”

 

  청년은 친구 말에 호스트바에서 일을 합니다. 단 하루 만에 백만원이라는 돈을 법니다. 배달 알바 한 달을 꼬박 채워야 받을 수 있는 돈을 하루에 벌었지만 청년은 기쁘지 않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마음이 휑합니다.

 

  이런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속상하지 않겠어요. 저 역시 어렵고 불안한 대학생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대학생들의 삶은 고등학교의 연장입니다. 경쟁하고 또 경쟁하고 또 경쟁합니다. 그렇게 인간성을 없애가면서 높은 스펙을 얻어 대기업에 간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떻겠어요. 연극을 보는 내내 그 사실이 너무 염려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너무 가여웠고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다

 

  제가 감정이입을 하게 된 인물이 한명 더 있습니다. 바로 마산에서 올라와 백화점에 취업을 한 사회초년생 여성입니다. 시종일관 발랄하고 명랑합니다. 어릴 적, 백화점에 가본 후 그곳에서 일하기만을 손꼽았답니다. 백화점의 모든 것이 자기 것만 같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대요.

  그러나 직장과 사회는 현실입니다. 더 이상 꿈속에 머물 여유를 주지 않지요. 이 친구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텃새에 시달립니다. 왕따를 시키고요, 사투리를 고치라고 타박하고요, 촌스럽다고 대놓고 흉을 봅니다. 명품 백 하나 없다고 멸시합니다.

 

 

 

  조선족 여성의 경우는 또 어떻고요. 스물의 나이에 한국에 와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여성에게 한국은 따스하다가도 곧 등을 돌립니다. 남성들은 달콤한 거래를 제안하고요, 일하러 간 곳에서는 돈을 못 받고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제대로 살아보려 마음을 먹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지요. 결국 진심마저도 거짓이라 의심하고 맙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리고 공감되었던 이유는 저도 이들과 같은 ‘서울사람들’ 중 한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거든요. 연극을 보는 내내, 대학생, 사회초년생, 조선족 처녀의 사이를 오갔습니다.

 

 


  연극은 허무한 ‘희망 고문’ 따위를 남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아마 연극이 끝난 후에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나갈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잖아?" 따위의 희망 고문을 남발하는 대신, 힘들 땐 힘들다고 악을 씁니다. 그런 후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지요.

 

  연극의 말미, 대학생 남녀가 주고받은 대화가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 마음 속에서 원하는 것, 그것에 귀 기울여 보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덧 저도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왕 살 것,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고요.


  서울에서, 서울사람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