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영화 <약속>은 벨기에 출신 감독 다르덴 형제의 1996년 작품이다. 이 영화 이후 <로제타>, <아들>이 연출됐다.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데, 시작이 이 정도라니 대단한 형제들 아닌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흔한 음악 하나 없고, 연출적 기교도 없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비결은 스토리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형제는 날 것 그대로의 스토리를 그저 펼쳐놓는다. 마치 실시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관객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절로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하는 건 오로지 관객들만의 몫이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긴장하고 고민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로저(올리비에 구르메)는 불법으로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는 자신의 건축 작업에 부려먹는 악덕 알선업자다. 그의 14살 된 아들 이고르(제레미 르니에르)는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악행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시거처에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던 아프리카 이민자에게 피하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민자 남자는 건물에서 떨어지고 만다. 정신을 잃어가던 남자는 이고르에게 남겨진 부인과 아기를 돌봐줄 것을 약속해달라고 하고 이고르는 약속한다.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지만 남자를 발견한 아버지는 일이 커질 것을 염려, 아직 죽지도 않은 그를 흙더미 속에 던져버리고 생매장해버린다. 아버지는 남겨진 부인조차 사창가에 팔아넘기려 하고, 아들은 그녀와 아기를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끝내 부인에게 아버지와 자신이 남편을 묻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인다. 부인이 남편의 행방을 물어올수록 더욱 큰 고통과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다르덴형제의 영화는 불편하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어떤 느낌이 오는가. 대번에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왜 불편할까. 영화의 소재라곤 하지만 허구가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실이기에 그렇다. 

  영화 속 아빠 '로저'는 이민자들을 불법 밀입국 시켜, 싼 값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고 아들과 살아갈 집을 짓게 한다. 불법인 자들을 데리고 와, 자신 역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로저는 이민자들에게 '강자'다. 대부분의 강자들은 약자들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로저 역시 자신의 필요에 의해 그들을 고용하는 것일 뿐, 불필요해지는 순간 가차없이 그들을 버리고 경찰에 밀고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열 네 살 '이고르'는 로저의 아들이다. 견습생 신분으로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우지만 로저는 그의 아들을 수시로 불러낸다. 이민자들을 감시하거나 여권을 수거하는 일 등을 아들에게 시킨다. 아들의 팔에 문신까지 직접 새겨주는 로저는, 스스로를 친절한 아빠라 여기는 듯 싶다. 이고르는 티 내지 않지만, 아마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따뜻한 밥을 주고, 금반지를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빠가 있어 다행이었겠지만 또래 아이들과 밤 늦도록 놀고 싶었을 것이다. 기술을 배워 어엿한 직업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고르에게 필요한 것은 아빠가 아닌 엄마였으리라.


[완전한 악당은 없다. 모두들 약자일 뿐]
  아프리카에서 불법이주한 노동자는 의식을 잃기 전 이고르에게 부탁을 한다.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데리고 온 아내와 핏덩이 아들을 지켜달라고. "약속해줄 수 있니?"라는 흑인 남자의 말에 이고르는 "약속할게요"라고 답한다. 의식을 잃은 남자를 바라보는 이고르의 눈시울이 뜨겁다.

  남자를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자는 아들의 말에 아빠 로자는 "병원에 가서 뭐라고 말할 거니? 우리집에 일하는 불법노동자라고 말할 거야?"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숨이 넘어가지 않은 남자를 나무상자 안에 넣고 로자는 시멘트를 들이 붓는다. 그러곤 아들에게 "난간에서 떨어진 그의 잘못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냐. 우리는 밀치지도 않았잖아"라고 말한다. 부자는 꿀꿀한 기분을 떨쳐보려 술집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지만, 찝찝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죽은 남자의 아내는 제 남편의 행방을 부자에게 묻는다. 빚이 많아 도망갔을 지 모른다고 말해도 아내는 남편이 근처에 있을 것이며,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 결국 로자가 생각한 것은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고 유인한 후 아내를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것.

  위의 줄거리까지만 읽는다면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펼쳐질지 관객의 입장에서는 몹시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다르덴형제의 영화가 늘 긴장감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들에게는 늘 곤란하고도 쉽지 않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 오는데, 그 선택이란 일반적인 게 아니어서 주인공과 관객을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로저와 이고르 부자는 불법 이주민들의 입장에선 무지막지한 악당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들 부자에게서 미움과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만 아니라면 매우 소시민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악당-선인', '가해자-피해자' 등의 이분적 법칙으로 몰고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은 평면적이지 않고 다채롭다. 다양한 본능을 드러내고 다양한 사고를 하고, 온갖 도덕적 갈등을 겪는다.

  삶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다 잘 알고 있는 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악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삶에 대해 보다 기대를 갖고 있는 아들은 악한 짓을 저지르려는 아빠를 피해 도망간다. 죽은 남자의 아내에게 "우리 아빠가 너를 사창가로 팔아넘기려 했다"고 1차 고백을 하고, 아이의 삼촌이 있다는 이탈리아로 이들을 보낼 비행기편까지 마련해준다.

  아빠 로저는 화가 나면 비록 손찌검을 하긴 하지만 아들을 몹시 사랑한다. 전화가 걸려온 아들에게 "그만 돌아오라"고 애걸복걸해보지만 아들은 '약속'을 지키려 애쓴다. 

  과연 이고르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죄책감 때문에 죽은 남자의 아내를 도와주었던 것일까. 선한 마음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이 7할이라면 나머지 3할은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초반, 이고르가 창고의 벽틈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장면은 사춘기 소년의 성적 호기심을 드러내 보이기 충분하다. 이고르의 주변엔 어떠한 여자도 없다. 아빠의 여자와 죽은 남자의 여자만 존재할 뿐.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렇다면 이고르는 여자를 사랑한 것일까. '사랑'이라고 말하기에 그 감정은 그리 단순치 않다. 영화 속에는 이고르의 엄마가 부재하는데, 어떠한 이유로 엄마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죽었을 수가 있고, 집을 나갔을 수도 있으며 이혼을 했을 수도 있다. 왜 엄마가 없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고르의 옆에 현재 엄마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흑인 여자는 피붙이 아들을 늘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고르는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모성애의 감정을 그 여자에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를 꼬옥 껴안고 말았던 것이리라.

  아빠의 추격을 따돌린 이고르는 아빠가 준 반지를 팔아 비행기 삯을 마련한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를 공항까지 마중해준다. 그날, 소년은 끝끝내 꺼내서는 안 될 두 번째 고백을 한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어. 높은 난간에서 떨어졌는데 아빠는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매장해 버렸어."라고. 

  그 말을 들은 죽은 남자의 아내는 다시 발길을 돌린다. 화를 내지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이고르는 그녀의 슬픈 등을 쳐다보며 함께 걸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렇듯이 어떠한 결말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지금도, 이 순간도 영화의 러닝타임은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아픈 까닭]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불편한 동시에 아프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아픈 현실을 잊어버리고 즐기려는 대중들의 심리를 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의 가슴 찌릿함, 타오르는 분노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형제의 연출이 다큐와 매우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주로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비도덕적 행위도 일삼는다. 이게 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이들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지만, 안 그러면 어찌 되는가. 이러한 아이러니함이, 갈등되는 선택의 순간이 그들의 영화엔 항상 존재한다. 웃고 즐기기 위해 영화를 택하는 이들이라면 몹시 당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어렴풋 희미하지만 '희망'이 존재한다. 영화 <로제타>의 엔딩에서 주인공 로제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삶을 견디기만 했다가 처음으로 목놓아 운다. 운다는 것은 감정을 배설한다는 뜻이다. 그런 로제타에게 청년은 손을 내민다. 손은 '용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장면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열 네살의 이고르는 어줍잖은 어른 흉내에 제법 건방져 보이지만 마음 만은 천상 '아이'다. 아빠의 뜻을 거역하고 흑인여자를 도왔을 때, 희망은 비로소 등장한다. 그리고 고백을 했을 때 흑인 여자는 말 없이 돌아 길을 걷는다. 진실을 숨김으로써 희망을 얻느니 사실을 고함으로써 고통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 역시 사실 아니던가. 이런 날것의 현실과 마주하면서 어렴풋 희망이 생겨난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고르의 삶에도 희망이 한 줄기 생겨난 것이다. 더 이상 타락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구정물 속에서 실오라기 같은 양심을 찾아냈으니.

  다르덴 형제의 나머지 작품도 모두 찾아 감상하려 한다. 다르덴 형제의 연출은 경이롭다. 이야기 역시 마음 아프지만 제대로 살아가려면 알아야만 하는 내용들이다. 영화를 오락거리로만 삼기엔 불편한 내게, 아주 딱인 영화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연출하게 될 앞으로의 모든 작품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