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장안의 화제인 영화, <늑대소년>을 드디어 보았다.

 

개봉예정영화 목록에 올랐을 때부터 보고 싶었다. <짐승의 끝> <남매의 집>을 연출한 조성희 감독의 첫 대중영화(굳이 구분 짓자면)였기 때문이다. 조성희 감독은 단편을 만들 때부터 이미 혜성처럼 떠오른 신예감독이다. 

 

그의 전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늑대소년>의 개봉소식을 들었을때 '이런 느낌의 영화일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졌을 것이다. 그 선입견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크로데스크'가 아닐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짐승의 끝>과 <남매의 집>을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늑대소년>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 영화는 조성희 감독에게 갖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다. 웰메이드 상업영화로 아주 깔끔하게 포장돼 나온 것이다. 조성희는 정말 난인물이다. 그의 후속작품이 벌써 기대된다면 지나친 애정일까.

 

 

 

 

<늑대소년>는 여성들의 '판타지'를 제대로 건든 작품이다.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영화가 불편하단다. 아마 러닝타임 내내, 잘생긴 송중기를 보아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일테고, 남자가 순애보를 지키며 한 여자만을 기다리고 또 여자에게 길들어지는 모습도 불편할 것이다.

 

TV에서 최수종을 보며 피로감을 느끼듯, 이 영화 역시 피로감을 안겨줄 수 있다. 옆에서 넋을 놓고 영화를 보는 여자친구를 보며 마음 속으로 '에이씨'라고 외칠지 모를 일이다.(물론 안 그런 남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여자들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영화다. 아주 잘생긴 송중기 같은 남자가 소년인 채로 나를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다니. 더군다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내게 "넌 여전히 예뻐"라고 말하다니! 달콤하지 않은가. 그런 늑대소년이라면 나도 당장 키우고 싶다!!!! 이런 판타지가 작용했기에 전 연령대의 여성들이 영화관을 찾고 있는 것일 게다.

 

나이든 누군가에겐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아직 꽃봉우리가 피지 않은 나이의 소녀에겐 사랑을 기대하게 하는. 그래서 이 영화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다.

 

 

 

인간의 보살핌 없이 늑대처럼 사육된 소년(송중기 분)은  한 소녀(박보영 분)를 만나 인간으로 길들어진다. 먹고 싶을 땐 먹고, 자고 싶을 땐 자고, 그렇게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늑대소년은 소녀의 꾸지람도 잘 견뎌내며 인간의 삶을 배운다.

 

음식만 보면 달려가 개걸스럽게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소년이었지만 마침내 본능을 억제하고 참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소년을 길들인 것은 다름아닌 소녀의 사랑이었다.

 

 

소년이 본능을 참고 멈추거나 기다리면 소녀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잘했어"라는 말과 함께 따뜻하게 웃으며 말이다. 말할 수 없는 짐승에게도 온기는 통하기 마련이다. 소년은 소녀의 체온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길들여진다.

 

쓰다듬을 받기 위해 소년은 소녀의 말에 따르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충성심이다. 조건 없는 사랑.  개가 목숨을 바쳐 주인을 지키듯, 소년은 소녀를 끝까지 지켜낸다. 그것은 야생에서 자란 소년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소녀의 노력으로 소년은 인간스럽게(?) 변모한다. 식욕도 참을 줄 알게 됐고, 삐뚤빼뚤 글씨도 쓰고, 노래가 아름답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행복은 곧 부서진다. 소녀를 사랑하는 청년이 '악역'을 자처하면서 소년을 공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소년의 존재가 밝혀지고 소년은 쇠사슬에 묶여 창고에 갇힌다. 그리고 24시간 관찰 대상이 된다. 애초에 소년을 실험대상으로 키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교수에게 소년은 학문적으로 놓칠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이다. 그리고 안기부에서 온 듯한 군복을 입은 남자에게 소년은 들통나서는 안 될 처치 대상이다.

 

 

 

소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소녀를 사랑하는 청년은 삐뚤어진 복수를 계획하고 늑대소년은 오해의 오해를 받게 된다. 늑대소년이 말하는 걸 배웠더라면 저렇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텐데! 관객들은 답답해서 가슴을 팡팡 치게 된다.

 

이 순간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이거다. 장씨아저씨는 왜 사람들이 모두 모인는 자리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양아치같은 청년을 찾아가서 경고하듯 말한 것일까. 그런 의문 속에 늑대소년은 오해와 의심을 받고 결국 인간세상에서 추방 당하게 된다. 소년이 택한 것은 소녀를 안고 숲속으로 달아나는 것. 그러나 영화 <킹콩>에서 킹콩이 사랑을 이룰 수 없었듯, 늑대소년 역시 소녀와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고서 족히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소년은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의 모습인 채로. 기특하게도 말도 배웠다. 그러곤 할머니가 된 소녀에게 머리를 내민다. 쓰다듬어 달라고. 소년은 쓰다듬의 온기를 잊지 못한 것이다. 자기만의 사랑법인 '충성심'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기다림' 때문인 것 같다. 요즘처럼 빨리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지루해한다. 어쩌면 영화에서처럼 순애보를 간직하고 한 여자를 기다릴 수 있는 건, 온전한 인간이 아닌 반은 '늑대'인 소년만이 할 수 있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은 어려서부터 사랑마저도 학습 한다. 극중 할머니의 얼굴을 한 소녀가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주는 손녀딸에게 "돈 많은 남자니?"라고 말하듯, 우리는 사랑에 있어 '조건'을 먼저 봐야한다고 그래야 잘 산다고 학습되어 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더욱더 '조건'이 중요해진 오늘날,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대리 만족감'을 안겨주는 것 같다.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혹은 그런 남자가 없어 못하는 여자들에 대한 대리 만족. '철수 같은 소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일어나지 않을 상상을 하며.

 

<늑대소년>, 동화처럼 참 예쁜 영화다.

 

 

+ 보태기

 

1. 이 영화가 동화같은 이유 하나 더.

->>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리얼리티가 상당히 떨어진다. 아무리 실험으로 탄생한 소년이라지만 어떻게 저런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늑대소년이 탄생 가능한가 하는 현실성에서부터 폐병에 걸린 소녀가 혼자 헛간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과연 가능한 일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또, 소년은 평소 육식주의자였을텐데 그렇게 굶주렸다면 장씨아저씨네 염소는 진작에 다 잡아먹고 소녀까지 먹고 싶었을텐데 어째서 고구마 같은 것에 열광하는가에 이르기까지. 딴지 걸 것이 많은 영화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가위손'처럼 전설의 성격이 강한 동화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2. ost 좋고나.

->> 극중, 소녀가 늑대소년에게 들려주는 노래, <나의 왕자님> 참 좋다. 가사도 이쁘고. 나도 기타를 배우면 나의 왕자님께 들려줄 것이다. (그렇다, 나도 판타지를 잔뜩 머금은 소녀같은 감성의 여자였던 것!!!! 두둥.)

 

 

나의 왕자님

 

밤새도록 창밖에
햇님이 뜨길 기다려요
아침이오면 그사람을
만날수있으니까요
고마워요 내손 잡아줘서
고마워요 내눈 바라봐서
고마워요 내가 그리던 왕자님
이렇게 내앞에나타나줘서

하루종일 하늘에
달님이뜨길 기다려요
한밤이 오면 그사람과
이야기할수 있으니까요
잊지마요 우리의약속을
잊지마요 우리 비밀들을
잊지마요 내가 당신의 눈빛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었는지

 

 

 

 

 

비지터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타드젠킨스, 하즈 슬레이먼 등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홍기자와 이 영화 <비지터>를 봤다. 홍기자가 제안한 영화였다. 홍기자의 안목을 믿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봤다.

 

  영화는 매우 잔잔하다. 줄거리만 읽자면 언뜻 '감동 코드'의 음악 영화로 보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렇지 않다. 주인공은 아주 천천히 마음을 열고, 음악을 통해 아주 천천히 변화 한다. 만약 영화가 관객들을 대놓고 감동시키려 노력했다면 극적인 반전과 극적인 변화를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주 담담히 주인공의 변화와 용기를 따라가고, 미국에서의 불법이민자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엔딩 역시 감동 코드와는 빗나가며 마무리 된다.

 

 주인공인 대학교수 월터의 삶은 단조롭다 못해 심드렁하다. 20년째 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월터는 학습계획서에 매년 연도 표기만 달리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열정 역시 제로다.

 

 

 

  주인공 월터는 위의 사진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가장 많이 짓는다. 학생들의 얼굴을 마주치지도 않고 강의를 하고, 무표정으로 혼자 식당서 밥을 먹고,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무표정하다. 마치 웃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 근육은 딱딱히 굳어 있다.

 

 월터는 세상을 뜬 피아니스트 부인을 생각하며 피아노를 배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4번째 선생님과도 작별을 한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 월터에겐 피아노 하나를 배우는 것 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날 월터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이민자 '타렉' 커플과 마주친다. 타렉 커플은 당장 갈 곳이 없고, 월터는 어떤 마음에서인지 그런 그들을 집에 며칠 더 머물게 한다.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젬베를 가르쳐 준다. 

 

 

 

  바로 위 악기가 '젬베'다. 젬베(djembe)는 서아프리카의 전통 악기다.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원추형으로 된 사발 모양의 드럼으로 공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어디서든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타렉은 시리아에서 온 불법이민자로, 뉴욕의 bar나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살아간다. 타렉의 여자친구 자이나브 역시 세네갈에서 온 불법이민자로 핸드메이드 악세서리를 팔며 살아간다.

 

  월터는 타렉이 가르쳐 주는 젬베에 금방 빠져든다. 고지식한 교수답게, 땀이 날 정도로 혼자 열심히 연습을 하고 그렇게 실력은 꾸준히 늘어간다. 커다란 덩치를 동그랗게 말고 북에 몰두한 월터의 모습은 진지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둥 두둥 둥' 세 박자의 리듬에 한껏 빠진 월터, 그동안 뜻대로 되지 않은 삶을 떨쳐버리려는 듯 아주 힘차게 북을 두드린다.

 

  이쯤 되면 영화는 잔잔한 '음악 영화'로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영화는 청년 타렉이 지하철역에서 붙잡혀가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불법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깊숙히 끼어들기 시작한다.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본국으로 추방당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삶은 우리에게도 결코 생경하지 않다. 우리나라 역시 불법이민자들에게 관대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 조차도 불법이민자들에겐 주어지지 않은 사치일 뿐이다. 월터는 타렉을 도우려 발벗고 나선다. 어쩌면 월터에게는 생의 첫 친절이자 자발적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월터는 타렉을 돕는 과정에서 타렉의 엄마를 만나고, 영화는 '로맨스'로 흘러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고, 어쩌면 사랑까지 했지만 영화는 두 사람을 이어주려 들갑 떨지 않는다. 결말 역시 담담한 이별이다. 그래도 월터는 분명 이전과 달라졌다. 혼자 젬베를 들고, 지하철역에서 둥 두둥 둥 북을 두드릴 지 누가 알았겠는가.

 

 영화는 관객들의 예상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음악 영화일까 싶은데 어느 순간 불법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로, 어느 순간 로맨스로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관객들을 감동시키려 하나의 코드를 고집하거나 그렇고 그런 틀에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은 감독에게 괜시리 고마운 마음이 든다.

 

  큰 용기를 내어, 삶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월터처럼 이영화를 본 관객들이나 모두는 분명 한 걸음 삶에 대해 관조적인 자세를 취했을 테니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다시금 느꼈다. "내가 살아가려는 삶의 방향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끝>

 

 이가 보일만큼 환한 웃음은 아니지만, 결국 웃는 것에 성공하는 월터. 남은 여생은 분명 더욱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누가 나에게 "네 인생의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가위손>이라고 말할 것이다. 조니뎁이 나에게 연락이 와서 "당신의 블로그가 한국에서 영향력이 높으니, 부디 귀하의 블로그에 최고의 영화를 쓸 적엔 내가 출연한 영화를 써주시오"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때다. 연휴를 맞아 TV에서 한국어 더빙판으로 방영해주는 걸 시청했다. 당시 나는 제주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었던 지라, 문화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TV에서 나오는 <주말의 명화>류의 프로그램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가위손>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가위손 청년에게 호기심을 가지며 열광했다가 곧 그를 왕따시키는 건 이해되지 않았지만, 순백의 눈이 흩날리는 풍경과 알록달록한 마을, 킴을 향한 짝사랑은 어린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가위손은 당시의 내게 조금은 야한(?) 영화이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야함의 기준은...부끄럽게도 '뽀뽀(키스)'였다. 영화에서 푸들을 안고 다니는 아줌마가 가위손을 유혹(?)하는 장면이 있는데 혼자 민망해 얼굴이 빨개졌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노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손톱의 때만큼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지만, 한동안 내게 가위손의 잔상으로 오래 남아있었다.(아, 그까짓껏에!!! 나는 사춘기였던가.)

 

그 후 정말 사춘기가 됐다. 그 사이, TV에서 방영되는 <가위손>을 수차례 보며 자랐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영화잡지 기자가 되겠다며 돌연 선언하고(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가위손>비디오테이프를 구해 진지한 마음으로 돌려봤다. 한국어로 더빙되지 않은, 주인공들의 천연 그대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위손은 또 다른 감흥을 내게 안겨줬다.

 

당시 나는 '조니뎁'의 팬이었다. 가위손 '에드워드'는 조니뎁을 위한 캐릭터 같았다. 지금도 나는 조니뎁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가위손의 에드워드를 꼽는다. <캐리비안의 해적>에서의 '잭스패로우'역도 아주 잘 어울리지만, '갑'은 뭐니뭐니해도 에드워드라고 생각한다.

 

에드워드는 괴짜 과학자의 불운한 발명품이다. 창백한 얼굴 곳곳에는 상처들이 가득하다. 살아가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성에 홀로 남은 가위손은 겨울만 되면 훌륭한 조각가로 변한다. 얼음조각을 가위손으로 손질해 아주 멋진 조각을 만들어내고, 얼음송이들은 함박눈이 되어 마을에 흩날린다.

 

사람들은 가위손 청년의 존재를 알게 된 후 큰 관심을 갖는다. 그에겐 결핍이었던 '가위손' 마저도 평범한 사람들에겐 '유니크함의 상징'이 된다. 가위손은 하나의 트랜드가 되고, 에드워드는 마침내 방송출연까지 한다. 사람들의 정원을 손질해주기도 하고, 미용실을 열어 멋진 머리를 만들어주는 헤어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한다.(이 영화가 개봉된 후 '가위손'이라는 상호의 미용실이 많이 생겨났다.)

 

영화에 사랑이 빠지면 허전하다. 이 영화 역시 '사랑'을 키워드로 넣어 에드워드를 파멸(응?)로 몰아간다. 에드워드는 화장품 외판원 아줌마에 의해 발견이 되고, 마을로 내려가 아줌마네 집에 묵게 된다. 아줌마네 집에서 딸 '킴(위노나라이더)'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사랑'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마을에서 추방 당하게 된다. 에드워드에게 사랑은 순수한 마음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드워드의 '순수함'을 원래의 그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많이 퇴색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순수한 에드워드는 결국 사랑 때문에 상처입고 자신의 성에 홀로 들어가 갇히게 된다.

 

영화는 백발의 한 할머니가 손녀에게 "옛날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되는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슬픈 에드워드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고, 에드워드를 사랑에 빠지게 한 '킴'이라는 처녀가 백발의 할머니라는 사실을 슬쩍 알려준다.

 

 

영화 속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이 장면을 꼽아야겠다. 금발의 킴(위노나라이더)이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흩날리는 얼음 아래에서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던 장면. 정말 로맨틱하지 않은가.

 

옆에서 에드워드는 조각상을 만들면서 열심히 가위질을 하고 있고, 킴은 옆에서 춤을 춘다. 지금 생각해보니 킴은 조금 눈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성질이 못됐다면 "난 일하는데 넌 춤이나 추고 있고 혼날래?"라고 했겠지만, 에드워드는 이미 킴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뭔들 안 이뻤겠나. 그리고 이 장면이 빠지면 로맨틱함의 절정도 사라져버릴테니(뭐라는 건가 나는).

 

 

이 장면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에드워드가 화장품 외판원 아줌마네 집에 처음 가게 된 날, 아줌마가 딸의 방을 안내하며 에드워드에게 하룻밤 자라고 한다. 딸은 남자친구 일행들과 놀러 가, 방엔 아무도 없다. 에드워드는 침대에 누웠다가 물컹물컹한 침대가 낯설어 깜짝 놀라, 팔을 휘휘 휘두른다. 그때 갑자기 침대에서  물이 마구 새어나온다. 침대는 바로 <물침대>였던 것.

 

아줌마 센스하고는. 손이 가위로 된 이에게 어찌 물침대에게 자라고 할 수 있는가. 옥장판 혹은 돌침대면 모를까. 지금 생각해보니 아줌마 참 센스 없네. 하여간, 아줌마의 센스 덕에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물침대 씬'이 탄생한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팔을 휘두르는 에드워드와 마치 성이 난 듯 퐁퐁 솟아오르는 물! 이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나는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 당시의 내가 연애 경험이 전무한 꿈 많은 여고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백의 사랑에 가슴이 콕콕 따갑고, 가위손 에드워드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던 나는야 여고생이었으니까.

 

영화 촬영 후, 조니뎁과 위노나라이더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조니뎁은 '노니포레버'라는 문신을 팔뚝에 새겼는데, 지금은 아마 지웠을 것이다. 하여간 청춘스타의 아이콘이었던 두 사람은 사람들의 질투와 응원 속에서 예쁘게 사랑하다가....헤어졌다.

 

한창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사진은 아직도 인터넷 상에 떠돌아 다니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내 블로그의 배경사진이다. 조니뎁은 위노나라이더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고, 위노나라이더는 또 사랑스럽게 조니뎁을 응시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커플이 왜 깨졌냔 말인가. 당시엔 그것 마저도 가슴이 아팠는데 지금은 십분 이해한다. "두 사람이 영원토록 사랑하였습니다"는 그야말로 영화적인 이야기니까. 그래서 조니뎁과 위노나라이더는 <가위손> 속에서만 영원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위손 빠>가 된 나머지 에드워드 피규어를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용돈을 탈탈 모아 샀을만큼 귀한 것이었다. 아마 해외구매를 통해 샀을 거다. 피규어는 바로 위의 사진 속 모습을 가장 빼닮았다.

 

방금 검색해서 피규어 사진을 찾았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던 녀석이 바로 요거랑 같은 제품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가위가 움직인다. 이런 멋진 녀석을 우리 엄마가 내가 없는 사이, 흉측하다며 버려버렸다. 으악, 그때 내가 얼마나 절망했던지. 엄마는 "집에 두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라는 말로 나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는데, 엄마에게 꼭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엄마! 집안에 재수가 없던 건 에드워드 때문이 아니라구영 엉엉.

 

이 후에도 엄마는 내가 모은 영화잡지며, 비디오테이프며 많은 걸 버렸다. 그래도 피규어를 버렸을 적만큼 슬프진 않았다. 엉엉.

 

하여간, 피규어의 신세가 처량하다. 쓰레기통을 한바탕 뒹굴었을 에드워드를 누군가 꺼내 가서 잘 보살펴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생김새가 누구에게 사랑받을 생김은 아니라서 흑흑. 하여간 말이 길었지만, 이러저라한 이유로 내겐 <가위손>이 내 인생의 최고의 영화다. 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