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고뇌하며 읊조린 이 대사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아마 이 대사는 햄릿을 창작한 '셰익스피어'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햄릿>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상연 소식이 들렸을 때, 꼭 보고 마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티켓 값을 보고 절망했다. VIP석이 무려 20만원을 호가하는 것이 아닌가.(왜 나는 4등석도 있는데 꼭 VIP석만 생각하고 쉽게 절망했을까. 4등석은 4만원대인데 말이다).

망설이던 찰나, 트위터를 통해 출판사 '김영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응모했고 상품으로 뮤지컬 햄릿의 티켓을 선물 받았다. "앗싸!" 운이 좋았다. 기쁜 마음으로 지인과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된 햄릿

공연은 비극을 다룬 극 답지 않게 제법 경쾌하다. 삶과 죽음, 배신과 복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시종일관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뮤지컬은 체코의 국민가수 야넥 레덱츠키의 음악을 덧입혔다.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음악에, 젊은 배우들 역시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무대 위에서 한바탕 신나는 공연을 펼친다. 조연들의 유머 역시 상당하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을 따라부르게 할만큼 쉽고도 경쾌하다.



주인공들의 복장 역시 현대적이다. 햄릿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햄릿을 맡은 박은태는 검정색 가죽자켓에 검정색 가죽바지, 부츠를 착용했다. 머리는 웨이브 있는 컬을 넣었고 살짝 드러낸 가슴은 근육으로 탄탄하다. 현대판 햄릿의 모습인 것이다.

이렇듯 햄릿은 옛 모습 그대로 무덤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게 아닌, 옆집의 잘생긴 오빠처럼 우리들 곁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두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시대극이지만 무겁거나 동떨어지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까지 차지해 왕의 자리에 오른 삼촌를 미워하는 햄릿은 매일 밤마다 유령인 아버지를 만나며 고통스러워 한다. 아버지는 음성으로 꿈으로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이 실은 동생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데 이때부터 햄릿은 삶의 모든 것을 '복수'에 둔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구렁텅이같은 삶에서 햄릿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복수! 복수 뿐.

이런 걸 아는걸까 모르는걸까, 왕은 햄릿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햄릿은 자주 철없고 덜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치 철없는 남동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원작에서의 햄릿은 삶에 대해 고뇌하고 분노하는 어두운 인물로 표현됐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도 저지르고 변덕도 심한 인물로 표현된다. 명랑하게 춤추고, 상대방을 거침없이 비꼬는 등 분노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대사도 그렇다. 원작에서 햄릿은 철학적인 사고로 삶에 대해 논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고통은 큰 물결을 무기로 맞닥뜨려 끝내버리는 그 어느 것이 더 떳떳한 생각일까?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잠들면 마음의 아픔과 육체가 겪는 수많은 충격이 끝난다고 말한다. 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결말이다. 죽는다는 건 잠잔다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그렇지만 뮤지컬에서의 햄릿은 "산다는 건 연극 같아. 죽는 건 잠시 잠드는 것일뿐"이라며 짧고도 단순하게 노래로 읊조린다. 그리고 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쉽게 다가온다. 정말이지 때때로 삶은 연극 같은 때가 많으므로.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 오필리어

<햄릿>을 읽을 때마다 가장 마음이 아프고 가여운 캐릭터가 있는데 바로 '오필리어'다. 끊임없이 햄릿의 구애를 받고 마음을 열었지만 정작 햄릿으로부터 버림 받는 비운의 주인공.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빠마저 잃어버린 오필리어는 결국 서서히 미쳐간다.


오필리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 바로 이 그림이다.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렸다.

원작 소설에서 오필리어의 죽음을 알리는 대목을 찾아 보았다. 햄릿의 엄마인 왕비가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에게 죽음을 알리며 장면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그림과 유사하다. 그대로 옮겨 보겠다.

<하얀 잎사귀를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치면서 시냇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애는 거기서 미나리아재비랑 쐐기풀이랑 데이지랑 자란으로 이상한 화관을 만들었다. 자란을, 무식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얌전한 처녀들은 사인지라고들 부르지. 아무튼 그 화관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올라갔다가 심술궂은 은빛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옷자락이 활짝 펴져서 마치 인어처럼 물에 한참 둥실둥실 떠 있었지. 그 동안에 그애는 옛 찬송가를 토막토막 불렀는데, 절박한 불행도 아랑곳없이, 마치 물에서 자라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단다. 하지만 그게 오래 갈리 없지. 물이 배어 무거워진 옷이 그 가엾은 것을 물 속에 진흙 사이로 끌고 들어가 버리고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말았다.>
-셰익스피어 <4대비극> 햄릿 중. (혜원출판사)


뮤지컬에서 오필리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다. "그건~ 사랑"이라며 반복되는 노래는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사랑을 갓 시작한 이의 심정이 되어 저절로 미소를 띠게 된다.

그러나 오필리어가 햄릿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면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닌 '희극'이 되었을 것이다. 햄릿에게 이별을 선고받고 혼자 남겨진 오필리어는 그만 미쳐 버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꽃 화관을 쓰고 연못 속에 빠져 죽는다.

뮤지컬에서는 오필리어가 연못이 아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에 연못을 꾸미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대안이 아닐까. 오필리어가 자살을 한 건지, 아니면 미친 나머지 정신을 읽고 그만 발을 헛디뎠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아마 말은 안해도 오필리어 역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되뇌었을 것 같다.

햄릿이 죽는 순간, 슬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표현 방식만 차이 있을 뿐, 뮤지컬은 원작의 스토리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했기에 극이 던지는 메시지의 무게를 최소화 됐으며 군데군데 잔재미를 첨가됐다.

그 덕분에 뮤지컬은 대중적인 취향에 맞춘 작품이 되었지만 역으로 아쉬운 측면도 많다. 약간은 코믹하고 느슨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탓에, 결정적인 부분에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특히, 엔딩 장면. 햄릿과 레어티즈의 싸움. 이 부분이 조금 더 치밀하고 묘사적이고 길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순간의 왕과 왕비의 심리적 표현도 구체적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모두가 다 죽어버리는 마지막 장면, 자칫 허무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도 너무 빠르게 전개된 나머지 정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래서일까, 뮤지컬의 막이 내리고 기억에 남는 건, 마치 '하이마트' cf를 보듯 귀에 익숙하고 발랄한 노래 뿐.

적어도 햄릿이 죽는 그 순간엔 눈물을 흘리게 되길 바랐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물론, 아쉬움 이상으로 만족감이 훨씬 더 크다.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뮤지컬을 보는 내내 햄릿에게 친근감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고전 속의 주인공으로 접할 때는 마치 할아버지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다루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을 통해 만난 햄릿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젊은이었다. 친구라는 생각이 들자,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뮤지컬을 보고 들어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책을 꺼내 들었다. 비운의 주인공 햄릿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셰익스피어는 정말 훌륭한 스토리텔러였구나"하는 생각. 너무 존경스럽다.

경쾌한 음악과 신나는 댄스, 멋있는 주인공들과 개성 강한 조연. 모든 것이 잘 배합된 훌륭한 공연이었다. 햄릿과 조금 더 친해져서 기쁘다.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목소리 더빙)


[영화 리뷰]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비록 예매전쟁에 밀려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위시 리스트'에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도 올라 있었다. 

영화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꼭 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위안했다. 다행히 영화는 영화진흥기구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무비꼴라주상까지 3관왕을 차지하며 소수의 영화관에 개봉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친구들은 다들 이렇게 물어왔다. "영화 괜찮아? 잔인하다며?" 그들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편하고 잔인해. 하지만 피 터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그런 잔인함은 아니야. 보고 나면 알게 될거야. 우리가 꼭 알아야할 잔인함이라는 걸"이라고 말했던가.

왜 이 영화를 <잔혹스릴러>라고 명명했는지 알아채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로 첫 장면부터 잔혹(?)하고 불편하니 말이다.

여기에서 잠깐,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줄거리를 살펴보자.

[영화의 줄거리]

세상이 버렸던 15년 전 그날, 그 끔찍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인한 ‘경민(목소리 오정세)’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목소리 양익준)’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한다. 경민은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목소리 김혜나)' 이야기를 종석에게 꺼낸다. 그리고 경민은 학창시절의 교정으로 종석을 이끌어, 15년 전 그날의 충격적인 진실을 밝히려 하는데...


강자가 되기위해 괴물이 되기로 한 '돼지들의 왕' 철이

영화는 회사 부도를 맞은 경민이 중학교 동창이던 종석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된다. 삼겹살과 소주를 앞에 두고 15년 만에 어색하게 마주한 중학교 동창인 이들은 중학교 시절을 추억(?)한다. 

종석은 소설가를 꿈꾸는 대필작가로, 경민은 어엿한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의 모습으로 술잔을 부딪힌다. 홍상수 영화 <하하하>에서 두 남자가 술한잔 기울이며 지난 여름을 회상하듯, 경민과 종석은 중학생 시절을 이야히 하고 그때마다 장면은 '플래시백'된다.

경민은 중학교 시절 '울보'였다. 키가 작았고 몸이 허약했으며 자주 눈물을 보였다. 종석은 경민 처럼 눈물을 보이는 사내는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키가 작고 힘이 약했다. 경민과 종석은 자주 힘이 센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학생선도부였으며,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힘까지 쎘다. 이들이 구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 반 친구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슬금 슬금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 앞에 '철이'가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철이는 반에서 존재감이 없는 아이 중 한명이었다. 얼굴은 어두웠고 자주 결석했으며 공부에는 흥미조차 없는 녀석이었다. 철이의 주먹은 매서웠다. 경민의 노트를 갈기갈기 찢은 녀석들에게 시원스레 주먹을 먹이는 철이를 종석과 경민은 경외스런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철이가 우리 모두를 구원해줄 거야"라고 말이다.

"돼지들은 늘 자신의 살을 찌우지만, 그 살은 돼지들 자신의 몫이 아니야. 다 개들에게 먹힐 살들이지. 우리는 돼지들이야"

"나는 그들이 지금 이 시절을 떠올리면서 '아 이런 때도 있었지'라며 추억하지 않길 바래.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로 만들어 줄거야"

"강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해. 강해지려면 악해지는 수밖에 없어"
※ 대사는 정확하지 않으니 양해 바랍니다

철이는 강해지려면 악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스스로 강자가 되기 위해 괴물이 되길 자처한다. 과연 철이는 강자가 될 수 있을까.




어리다고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중학교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 같다. 어리다고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권력'을 알고 복종할 줄 안다. 복종하는 자 위엔 군림하는 자가 있다.

아이들의 '힘'은 부모의 재력, 성적, 네트워크에서부터 기인한다. 철이처럼 가정 환경은 불우하지만 주먹이 쎈 친구가 공부 잘하는 이른바 '범생이' 친구들을 휘어잡는 세상은 지났다. 요새는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 학원 다니며 공부도 잘 하고, 잘 먹어서 체력도 좋지 않던가. 있는 자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는 결핍된 아이들을 장악한다. 이렇게 '작은 권력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권력은 제법 견고하고 탄탄하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변화하고 바뀔 것이라 희망을 품었던 종민과 경민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된다. 그들이 희망을 걸었던 돼지들의 왕 철이는 과연 그 과제를 해결해, 영웅이 되었을까?  대답은 노코멘트. 어떤 의미에서 철이는 영웅이고, 어쩌면 실패자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직접 접하길 바란다. 치명적인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아직 안 봤다면 꼭 보시라. 특히 기성세대들이라면.

앞에서 말했듯이, 영화는 잔인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덜 잔인하다. 피 튀기며 상처를 주고 입히는 잔인함은 아니지만 메세지 적인 측면에서 이미 충분히 잔인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점차 자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충격이고 고통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처럼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가 되길 포기한 채 돼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각하게끔 만든다. 모든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고통스럽고 경악스럽다. 스스로 찌우고 있던 이 살이, 나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임을 깨닫고 무기력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자각으로 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잘 알게 된 후에는 삶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발 내딛고 있는 삶이 어제도 오늘도 '여기'에 있지만, 깨달은 후의 내일은 '이전과는 다른 여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장르 개척

장르나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이 영화의 탄생은 의미 있다. <돼지의 왕>이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라고 한다. 올해 5월 편집본 작업을 끝냈으니 1년이 채 걸리지 않아 작품을 만든 것이다. 예산은 1억 5천만원.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작품은 제작됐다.

감독은 군대에 있을 때 이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시놉시스를 완성했다고 한다. 원제는 <1991년 우리들의 영웅, 철이>였다. 본인이 90년대 중학생이었던 까닭도 있고 목적의식이 분명했던 80년대를 지나 또 다른 싸움으로 정처없이 표류하던 상실의 시대 90년대를 다루고 싶었단다.

애니메이션의 원안은 만화가 최규석이 작업했다. 최규석은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대한민국 원주민> <습지생태 보고서> <울기엔 애매한> <100도씨>와 같은 만화 작품들을 그려왔다. 그의 작품에는 삶에 대한 반성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이, 약자들이 늘 주인공이었다. 심각하게 무게잡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최규석 만화가가 이 작품에 참여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을 만들기 전에 이미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최규석 만화가와 함께 손을 잡은 경험이 있다. 이 외에도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겸 배우), 김꽃비 등이 목소리 더빙을 하며 제작에 참여했다.

스토리 역시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 했던 것을 한단계 뛰어 넘었다. 보통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오세암> <마당을 나온 암탉> 등, 대부분 아이들의 동심을 얘기하고 성장 과정을 그린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돼지의 왕>은 불편할 정도로 사회의 적나라한 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동심만 있는 게 아닌, 다양한 욕망과 욕구를 지니고 있는 '개인'들이다. 약한 것을 보면 짓밟고 싶고, 많이 갖고 싶고, 늘 돋보이고 싶고, 힘을 과시하고 싶은 하나의 동물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영악함에 절로 고개를 흔들게 된다. 이 학창시절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학창시절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손을 들고 감독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라고.

그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분노하는 건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화가 나거나 부당하다 생각할 때 분노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 했던가.

희망담론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 안에 숨은 고통, 분노, 상처, 비명 등은 무시되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니까. 그렇지만 분노나 화는 자연스런 감정의 반응 중 하나다. 그렇기에 화날 땐 화를 내고, 요구할 땐 요구하고 비명을 지를 땐 과감히 '꽥' 질러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표현은 거대 자본이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에게 먹히기 않고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몸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슬프고 허무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시원했다. 아무리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봐도 이 도시는 '아스팔트 보다 더 차가우니까'. 그걸 인정하게 됐고, 그 안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연상호 감독, 차기작은 <사이비>

<돼지의 왕>을 보고 나서 연상호 감독의 팬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얻을 수 있었다. 아래 내용은 시네21에서 발췌한 것. 다음 작품은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라고 한다.

 
-차기작 <사이비>는 어떤 이야기인가.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다. 곧 수몰될 마을이 배경인데 그 마을에 사이비 교회가 들어오면서 진실을 말하는 악한과 거짓을 말하는 선인이 대립한다는 이야기다. <돼지의 왕> 제작이 미뤄지면서 썼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작업 중이다. 최악의 엔딩을 준비 중이니 기대해도 좋다. (웃음)

<돼지의 왕>으로 나태하게 하루하루 삶을 연명했던, 혹은 개들이라 착각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돼지들을 화들짝 놀라게 만든 연상호 감독.
그의 차기작 소식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끝>




워낭소리(Old partner,2008)

-다큐멘터리

-이충렬감독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워낭소리>를 보고 나오며 친구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영화 <워낭소리> 정말이지 강추다. 꼭 봐! 약속해야돼. 개봉은 2009년 1월15일이야"

 

영화사 홍보직원도 아닌데, 이렇게 열을 올리며 영화홍보에 나선 이유는 그만큼 영화가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취업난이다 뭐다 바쁘고 여유없게 살아가고 있는 내 주변 친구들이 꼭 한 번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독제 기간 '프리패스권'을 이용해 거의 폐인처럼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렇게 자진홍보한 적은 없었다. 나처럼 감동받는 이들이 많아서였을까, 이 영화는 2008 서독제 관객상을 받기도 했다.

 

 

 무대인사에서 이충렬 감독을 봤는데 푸근한 인상이 한없이 여유있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도 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며칠 전, MBC 문화관련 프로그램의 인터뷰코너에서 그를 인터뷰한 화면을 보고 알게됐다.

 외주제작 PD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의 이면들을 화면에 담아 방송으로 내보냈던 감독은 남들과의 타협에 익숙지 않았다. 그에겐 자신이 피땀흘려 찍은 방송은 내보내고야만 말겠다는 그런 '고집'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잘 안 되는 일들이 예기치 않게 생겼고, 그때마다 그는 '실패'란 걸 경험하며 절망하기도 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봤을 땐 강인한 인상이었는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열심히 제작한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다행이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며 가속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상업영화만큼 관객은 들지 않더라도 나처럼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들에게 추천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이 영화가 감동적이고 또 재밌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리얼리티의 힘. 실재하는 주인공, 스토리.

  -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리얼리티'의 힘 때문이다. 감동을 요구하지도 이야기를 꾸미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화면에 감정이입이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평생 소를 이용해 밭을 갈아 자식들을 먹여 살린 우리네 아버지. 도시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촌스럽고 청승맞을 지도 모르는 그 삶은, 어쩌면 스스로를 지탱해온 '고집'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주인 곁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제 할 일을 하는 소를 보며, 인간으로서 부끄러워 졌다. 그리고 열 마디 말 보다는 거친 손으로 소의 등을 쓱 쓰다듬어주는 할아버지의 태도에서 목이 메어왔다.

 

2) 할머니의 잔소리. 귀염둥이 천상 여인, 할머니.

 - 할아버지의 부인 할머니는 정말 귀엽다. 만약 이 영화에서 할머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영상이 다소 심심하고 평면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 영감때문에 고생이 많지"라는 불만으로 시작해 "우리도 기계로 농사 지읍시다. 네?"라는 생때섞인 권유까지.

 할머니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할아버지 흉을 봐도 밉지 않은 이유는, 할머니의 말투에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기계를 사지 않을 거란 걸, 농사를 쉬 놓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노동가'처럼 한 마디 툭 던지고 나면 마음이 풀어지고, 그걸 알기에 쉼없이 재잘거리는 것일 게다.

 할머니는 역시 우리네 천상 여인이셨다.

 

 3) 할아버지의 고집. 21세기지만 변치 않은 우리 농촌의 일상.

- 할아버지는 시대가 바뀐 걸 개의치 않는다. 한미FTA다 뭐다 농촌이 개방되고 미국산 쇠고기가 몰려오고 한우의 가격이 떨어지는데, 그 와중에도 할아버지는 우시장에서 늙은 소를 500만원에 팔려고 한다. 그랬다가 망신을 당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런 풍경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삶의 철학처럼 인생의 한 부분만은 굳게 지켜온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농촌을 생각하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밭을 일구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괴듯이, 할아버지의 묵묵한 일상은 그 자체가 감동을 준다.

 

 

 

 

 

 

 평생을 일을 해온 주인공 '소'.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도 짐승인들 쉬고 싶지 않으랴. 그런데도 그 말라붙은 등짝에 힘을 팽팽히 주고, 굵고 굵은 뼈마디를 쉬엄쉬엄 움직이며, 밭을 갈고 장작을 나른다.

 

 소가 이끄는 수레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길을 가며, 할아버지는 깜빡 잠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멍하니 먼 산을 응시하거나.

 소가 이끄는 수레 곁을 차들이 쌩쌩 속도를 내며 지나간다. 그럼에도 이 둘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나온 그림인듯, 평정심을 유지하며 제 갈길을 그렇게도 열심히 간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열심히, 뚜벅뚜벅 제 갈길을 향해 걸어가느냐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감동은, 그렇게 우리네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고나 할까. 마음이 뭉클거리고 따뜻해지고 마침내, 감동은 징-하게도 오래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