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벌
죄와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2007년 9월28일
'다민족축제'가 열리던 당일 러시아부스에서 O,X퀴즈 3문제 이상을 맞춰서 얻은 상품. '논슬프로그램세계명작'이란다. 그림이 그려져있고 글씨도 크고 읽기 편할 것 같아 골랐다.
역시나 한시간 반 정도 걸려서 후딱 읽을 수 있었다. 편하고 쉽게 읽히긴 했으나 "원래는 책이 굉장히 두껍다"는 선배 말을 들으니 두꺼운 책을 읽을 것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작품의 느낌이나 감흥은 충분히 전달된다. 물론 이 책이 원래 '죄와벌'작품의 '학예회'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ㅋㅋ선배말에 따르면 그렇단 거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영화 '데스노트'가 생각났다. 데스노트에서 사신의 힘을 얻은 주인공은 "세상에 불필요한 인간들을 없애는 것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라고 주장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불쌍한 이들을 착취하며 선량한 이웃을 살해하는 '사회악'인 존재들을 하나 둘 씩 없애고 그는 결국 '21세기 판 영웅'으로 등극한다.
나폴레옹이나 홍길동 처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많이 가진 이들을 혼내주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점은 처한 입장마다 다르게 변할 수 있는 법. 과연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그들은 영웅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악'이라는 것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선'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이뤄지는 '악'은 과연 '선'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선과 악'으로 나눠지는 이분적 사고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됐다. 그리고 과연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문제인가, 라는 생각과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전부는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 역시 얻게 됐다.
이 책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늙은 노파를 살해한다. 그 이유는 노파가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어려운 이들을 착취해 번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논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초인이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한 용서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는 초인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음 속으로는 한없이 '나는 괜찮아', '내가 한 일은 잘 한 일이야' 생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굴욕감과 죄책감, 수치심을 느끼며 정신적인 황폐감과 우울증세까지 얻게된다.
죄를 자백해 투옥된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나쁜 일이 아니며 약한 마음을 가졌던 자신의 나약함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을 죽인 것은 '죄'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는 '소냐'의 한없이 깊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느낀다. 그리고 그 후에 옥에서 나온 후,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떻게 됐을지는...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결코 '사실'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잣대로 인해 우린 '선과 악'을 가늠하고 구분짓는다. 하지만 선과악이 '흑백'처럼 구분지을 수 있는 일일까 과연? 흑과 백 사이의 무수한 회색들의 외침을 알고 있다면 선과 악 사이의 갈팡질팡하는 무수한 감정들을 외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란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며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또한 '선악'의 구도로 결론짓기 힘들다. '선악'을 과연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의 죄역시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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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가 없다] 소설가 김지우를 아시나요?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2005)/ 창비
저자: 김지우
처음에 작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정지우'시인과 헷갈렸고, 그 밖에도 여러 작가와 헷갈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작품은 처음 접해본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워낙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때가 아니니까. 뒤늦게 모 선배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누군지도, 어떤 작품을 담았는지도 모르고서 책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깊숙이 빠져들었던 것은 그녀 특유의 문체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요즘 물살을 타며 떠오르고 있는 다른 여류작가들과는 문학적 색채가 다른 것 같다. 전경린 류의 난해하고 추상적인 미화어구와 달리 김지우는 토속적 문체가 강해 매끄럽게 읽힌다.(물론 전경린의 문체를 흉보는 건 아니다. 그녀 소설에 나오는 비유는 받아적을 만큼 훌륭한 것이며 소설을 통해 바라보는 그녀의 내면적 세계는 놀라울 만큼 대단하니까.)
어찌됐든 다른 여류작가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읽히고 이야기의 구조 역시 단순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시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구도가 아닌 읽으면서 전반적인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구조다. 그래서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투리를 사용한 토속적 어구, 해학적인 언어도 돋보인다. 읽다보면 인물들에게 정이 어리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이 난다. 그 사투리가 섞인 대사가 촌스럽다기 보단 따뜻하다. 욕설하나도 무진장 정감어리기 때문에.
그녀의 글엔 겉치장이나 억지스런 꾸밈이 없어 좋은 것 같다. 소설 하나하나 극중 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간다는 것도 장점인 듯 싶다. 결말 역시 '끝'이나 어떤 상황의 제시가 없다. 다른 소설들을 읽다보면 친절하리만큼 설명을 하거나 아주 난해하게 끝을 맺는데 그녀의 소설은 끝마저도 평범하다.
극의 전개를 끝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놓는 끝맺음. 마치 장편소설인 듯 싶게 뒤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그러하다. 그래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뒷 이야기에 대한 상상은 각자가 하기 나름이지만 몇몇 이야기는 과연 결말이 어떻게 이뤄졌을지 몹시 궁금타. 몇몇 작가들이 전작을 이어 후작을 내놓듯, 그런 기대감을 그녀에게 가져보지만 끝내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기에.
이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만이 '김지우'라는 작가에 대해 고작 "알고 있다"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슴치 않고 "아까운 작가를 한 명 떠나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건 그만큼 그의 소설이 내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아주 편안하게 말이다. 아주 깊게 기억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저 멀리 내팽겨쳐버리도 않을 책이다. 그녀를 저세상에 보낸 사실이 새삼스레 가슴 아픈 건 그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든 소설의 "뒷 애기가 매우 궁금하다"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모두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이글은 2007년도에 작품을 읽은 후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소설의 내용은 가물가물합니다만, 기록한 글이기에 고스란히 새로운 둥지인 이곳에 옮겨 적습니다. 생각난 김에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 김지우 소설가(1963년-2007년 3월 24일)
김지우 작가는 196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0년 단편소설 〈눈〉으로 제3회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2005년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를 펴냈다.
길지 않은 활동 기간 동안 김지우씨는 대체로 변방의 보잘것없는 인물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뚝심과 고집을 소설에 담아 와 주목을 받았다.
2007년 44세의 나이로 뇌부종을 앓은지 한달 만에 숨을 거뒀다.
2011년 4월에는 동료 문인들이 고인의 묘비를 세워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고창의 묘소 앞에 세웠단다. 선배 소설가 현기영씨가 ‘젊은 작가 김지우 여기에 누워있다 자비로운 햇빛이여, 이 무덤 따뜻하게 하소서’라는 묘비명을 썼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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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불행하다 말하는 건 제3자들의 시선일뿐
감독: 이 한/ 주연: 유아인, 김윤석 등
영화 <완득이>가 4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개봉 2주 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본 나는 내심 이 영화가 잘 되길 바랐다. 보는 내내 눈물을 쏙 뺐다가 거침없이 웃겼다가 사람을 쉴새 없이 주물렀다 놓는 요 근래 보기 힘든 '참 귀여운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려령 작가의 소설 <완득이>가 원작
영화 <완득이>는 김려령 작가의 소설 <완득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연애소설> <청춘만화> <내사랑> 등을 만들어온 이 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주인공은 열여덟살 완득이. 키가 작아 ‘난쟁이’라 불리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 없이 홀로 자란 소년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꿈도 없고 공부에도 흥미없는 완득이의 옆집에는 담임 선생 ‘동주’가 살고 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밤낮없이 “완득아”라고 불러대는 담임 ‘똥주’가 완득이는 심히 귀찮다. 매일 교회를 찾아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기도는 쉬 이뤄지지 않는다(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 이유는 영화에서 짐작할 수 있을만큼 설명된다).
‘스승과 제자’라는 틀 안에 가두기에는 충분치 않은 완득이와 동주.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재밌지만 가슴 찡하고 때론 아프다. 너무 잘나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못나지도, 너무 비관적이지도 그렇다고 유별나게 긍정적이지도 않은 열여덟살 완득이는 씩씩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나간다’. 거기에서 이 영화의 감동은 시작된다.
무겁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도 않게
소설이 매우 쉬운 문장으로 진행되는 것만큼이나(김려령 작가의 힘은 바로 이러한 문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역시 무겁지 않게 전개된다. 영화가 시종일관 밝고 유쾌하게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영화 속 소재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 노사문제, 한부모 가정 등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사회적 문제를 괜히 심각하고 어둡게 펼쳐내지 않더라도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현실에서 1인칭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3인칭 사람들이 바라볼 때처럼 그리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충분히 행복해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 그들을 사각지대에 내몰고 피해자로 어둡게 포장한 것은 어쩌면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들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작과 같게, 또 다르게 - 호정 캐릭터 김려령 작가에게 얻어
영화는 원작을 비교적 잘 따라가면서도 미묘한 차이로 맛을 배가 시켰다. 영화를 보기 전 소설을 먼저 읽었다면 실망했을까?(보통, 소설을 먼저 읽고나서 본 영화는 대부분 큰 실망을 주곤 했었다. <퇴마록>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향수> 등등이 그러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뒤늦게 김려령 작가의 소설을 읽었고 영화와 비교해볼 수 있었다.
우선, 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연출이 잘 되었다는 것일 테고, 배우들도 성실히 연기했다는 뜻일 게다. 연령대가 차이 나는 남자 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임에도 호흡이 전혀 엉성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하고 싶다(굳이 비교하자면 백윤식과 봉태규를 주연으로 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과 같은 영화와 비교하고 싶다).
조연들도 제법 생생히 살아 숨쉰다. 극중, 옥탑방에 살고 있는 똥주는 아침이고 밤이고 쉴새 없이 완득이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시끄럽다고 "씨불씨불" 거리며 창 밖으로 욕설을 내뱉는 옆집 아저씨 역의 김상호는 영화의 재미를 끌어올리기 충분하다. 조연들의 역할이 작았던 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각 조연들에게 좀 더 사연을 줘 살아 숨쉬게 했고 그것이 영화의 재미를 이끌었다.
그리고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조연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옆집 아저씨’의 여동생으로 등장해 똥주와 러브라인을 형성해 나가는 ‘무협지 작가 지망생’ 호정(박효주 분)이다. 시크한 표정과 부스스한 머리, 진지하게 무술에 임하는 모습 등. 미스테리한 그녀는 그래서 더욱 동주의 마음을 끄는데, 감독은 김려령 작가에게서 호정의 캐릭터를 착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시사회가 끝난 후, 김려령 작가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말투며 엉뚱한 대답이며 미스테리한 매력이 넘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영화 속 호정과 많은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 주변의 ‘진짜 이야기’, 힘내라, 도완득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점은 우리 주변의 ‘진짜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논픽션이기에 캐릭터의 묘사 등등이 과장된 측면은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품은 주제에 귀 기울이고 있자면 창조되어진 이야기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필리핀 등 동남아에서 시집 온 외국인 신부가 늘어나면서 ‘다문화 가정’은 우리사회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내 친구, 아니 어쩌면 나 역시 혼혈아일 수도 있다는 사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또 어떠한가. 그들을 핍박하고 무시하는 이는 ‘어느 공장장’ 뿐만이 아닌 우리 아빠 혹은 오빠, 아니면 나일 수도 있다는 사실. 이것을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상기시키고 있다.
영화의 엔딩 역시 마음에 든다. 복싱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고 삶에 임하는 자세를 배우는 완득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가 제법 훌륭히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호들갑 떨며 “완득이가 훌륭한 복서가 됐다”라는 식의 엔딩으로 매듭짓지 않았는데 실은 그래서 매우 다행이었다. 복싱을 한다고 복서가 된다니, 상상력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우리의 완득이는 어쩌면 똥주같은 선생님이 되었을 수도 있고,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식당을 차렸을 수도 있다. 무한대의 가능성을 갖고 무궁무진한 삶을 살아갈 이 땅의 완득이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넨다. “힘내라, 도완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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