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 이것이, 건강한 밥상

 

한살림에서 잡지를 만드는 SJ 언니네 집에 갔더니, 이렇게 한 가득 상을 차려줬다.

 

작년 겨울, 반 지하 미아동 방에서 함께 몇 개월을 보냈던 나의 '룸메'.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들을 통해 마음을 나눈 언니와 나. 올해 3월, 갑작스레 대구로 내려가면서 내가 살던 자취집에 언니가 남아있게 됐다. 세탁기, 냉장고 같은 물건들을 다 빼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살았다. SJ 언니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런데도 잘 버티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망원동 다세대 주택에 전세로 들어갔다. 요즘 나는 서울에만 가면 언니네서 머물고 있다.

 

언니가 살고 있는 집에는 옥탑이 딸려 있는데 그 곳을 페인트칠 한다고 했다. 도와주러 갔는데 언니가 고생한다며 밥을 차려줬다. 치과의사 NH 언니도 함께 있었다. 우리 세사람이 먹을 밥상이 이렇게 차려졌다.  언니가 한살림 장터에서 구입한 건강한 재료로 이렇게 상을 차려줬다. 망원동 시장에서 샀다는 '땡감'도 자리를 잡았다. 언니가 만드는 잡지를 넣어 사진을 찍었더니 화보가 따로 없다.

 

 

 

# 우리의 인연은,

 

우리는 '프레시안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언론사 프레시안에서 다양한 강의를 했는데, 그중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강좌를 들었다. 강사는 이문재 시인님이셨다. 서너 해 전의 일이다. 음, 아마 2011년도의 일인 듯 싶다.

 

강의에는 다양한 분들이 오셨다. 재래시장에서 두부를 만드는 분, 119 소방대원, 대학생, 대학원생, 고등학생, 주부, 화가 등등. 우린 꽤나 '합'이 좋았다. 그때 SJ 언니는 한살림에서 잡지를 만들고 있었고, NH 언니는 치과의대생이었고, 나는 모 협회에서 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여전한 건 SJ 언니. NH 언니는 치과의사가 됐고, 나는 대구에 내려왔다. 아참, 뭔가 '되었다'는 걸 기준으로 삼자면, 그래, 작가가 되었다.

 

함께 글쓰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다. 처음엔 일 년에 서너 차례 만나던 게 일 년에 한 번 꼴로 줄었다. 그런데도 만나면 반갑고 참 좋았다. 나는 작년 겨울 모임에 참석하고 못 갔다. 얼마 전에 우리의 스승님 이문재 시인님이 신간 시집을 펴내서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했는데, 그때 '번개'를 했다. 하지만 나는 대구에 있어 못 갔다.(정확히는 서울에 올라갔지만 일이 바빴다.) 사진을 보는데 참 좋아보이더라. 이문재 시인님의 꾸밈없는 진솔한 태도(그러면서도 거들막거리지 않는)를 알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참 좋으신 분이다.

 

# 프레시안 글쓰기 수업, 그리고

 

수업 첫 날, 자기가 쓴 작품 중 뭐든 하나를 들고 오라 하셨다. 나는 '뭐를 들고 갈까' 하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실 적에 느꼈던 감정이 적힌 에세이를 들고 갔다. 사실, 뭐 하나 변변하게 써둔 게 없었다. 수업 시간, 선생님이 내 글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기 전, 대뜸 "소설 써본 적 없냐? 없으면 당장 써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감정이 잊히지 않는다. 마음속에 뭉클한 뜨거운 게 치솟는 기분. 그 감정이 지금까지 날 끌고 왔다.

 

사실, 내가 이 수업을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에게 작가로서의 싹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이 수업을 받기 전, '영화 평론 수업'을 들었는데, 손톱만큼의 싹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중간에 하차했다. 나는 그냥 '고급 독자'로 남아야겠구나, 싶었다. '고급'이 아니면 '저급'이어도 되니 그냥 '보통의 독자'가 되어야겠구나, 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평론'이라는 게 굉장히 철학적이고 사유가 깊어야 한단 것을 깨달았다. 모든 창작이 그러하겠지만, 평론은 좀 다르다. 자신만의 철학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작품을 평해야 한다. 그게 조금은 폭력적으로 느껴졌고, 자신이 없어졌다.

 

20대 중반, 사회초년생으로 발을 내딛으며 '동화'를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 잊혀졌다. 그런데 또 생각이 났다. 그래서 이 수업을 들으며 확인하고 싶었다. 커리큘럼이 빽빽한 부담스런 수업이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수강 신청했다. 그리고 시인님께 소설을 써보란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싹이 있는 것 같아 기뻤다. 그래서 이후로 작가의 꿈을 꾸게 됐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됐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들이 있어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땐 몰랐다. 알고 싶어 발버둥을 쳤는데, 그런데도 몰랐다. 오히려 그땐 힘들었던 일이 지나고 나니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나의 감정에 압도 당하면 누가 뭐래도 잘 안 들리고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나고 나야 아는 것이다.

 

젊을 적부터 늘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꿈에 가까워질 수 있지?' 이런 고민을 하다, 멘토가 있었으면 했다. 언젠가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멘토'. 모두들 젊은이들에게 멘토를 만들라 하였는데, 내겐 멘토가 없었다. 그게 좀 부끄럽고 서글펐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멘토란 거창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늘 나를 지켜봤다가 코치하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겐 멘토였다(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밥상 이야기를 하려다 말이 길어졌다. 나의 글쓰기는 대부분 그러하다. 이런 글쓰기 역시 '나를 위한 글쓰기' '힐링 글쓰기'가 아닐까 한다. 비우고 나니, 오전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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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귀걸이를 만들었다.

지인들에게 선물해줄 생각이다.

우선은 내가 끼고 다니고 있다.

 

내가 단추 귀걸이를 왜 만들게 되었냐면,

만들어서 팔아보려고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예전부터 그냥 한 번은 꼭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걸 실행으로 옮긴 거다.

 

올해 여름, 삼청동에 놀러갔다가 단추 귀걸이 한쌍을 샀다.

귀걸이를 들여다보면서 왠지 나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까무룩 잊고 지내다가

어느날 단추 귀걸이가 문득 생각났고, 만들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연차로 하루 쉬던 날, 남대문 시장에 들러 단추를 몇개 샀다.

단추 15개 정도가 들어있는 한 묶음에 2천원.

색깔, 크기 별로 네 봉지 정도를 샀나 보다.

집에 와서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귀걸이.

가장 처음 만들어본 귀걸이가 바로 위의 것들이다.

 

그 후, 필을 받아 인터넷으로 단추를 종류별로 주문해놓고

몇 개 더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도 올려봐야겠다.

 

'부업을 해볼까'라는 건방진 생각을 해보는 요즘이다. 캬캬.

 

그런데... 부업을 하면 팔릴까요? (털썩)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많고 많고 많아, 손에 꼽을 수가 없다. (먼산)

 

오래오래 살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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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슴에 품은 꿈은 네 가지였다.

동화작가, 기자, 영화홍보마케터,  출판 에디터.

 

어릴 적 동화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하필 동화작가를 하고 싶었을까.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나의 글을 보고 동화작가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해서 그런 꿈을 품은 것도 같다.(그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헤어진지 오래 됐지만, 내가 동화작가가 된다면 누구보다 기뻐해줄 사람이다. 그리 믿는다.) 그리고 과거로 올라가자면, 어릴 적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밝고 명랑했지만 자주 외로운 아이였는데,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래서 나랑 비슷한 외로운 아이들을 위로해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동화작가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품어왔던 꿈이었다. 정확히는 '영화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매학년 진로조사를 할 때마다 그냥 '기자'가 아닌 '영화잡지사 기자'라고 좁은 칸에 눌러쓰곤 했다. 그 시절 <스크린>이라는 월간영화잡지의 구입해 읽곤 했는데, 막연히 그 잡지사에서 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시네21은 제주도 중에서도 아주 시골인 우리 마을 서점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영화' 보다는 '진보 언론'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의식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심이 넓어졌다. 그리고 졸업 무렵, 모 매체의 대학생 인턴기자로 짧게 활동하면서 스스로 기자가 될 깜냥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기자로 살기에 나는 냉철하지 못했고, 우유부단했으니까. 그리고 모질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에 시작한 일이 '영화홍보마케터'였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나에게 무척 재밌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할수록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판은 굉장히 상업적이고도 자본적인 논리로 돌아고 있었다. 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제작사, 그 아래로 수많은 홍보사가 줄을 서고 있었다. 홍보마케터들은 취향에 맞는 영화를 홍보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영화를 홍보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래야했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했지만 그 안은 궁핍했다. 만약 내가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오래오래 일했을 것이다. 허영심을 채워주기엔 충분한 세계였으니까. 그러나 그 즈음, 집안에 큰 일이 생겨 제주도로 내려가며 일을 관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책이 좋아 출판 에디터를 하고 싶었다. 출판인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지원했다가 필기시험에서 떨어졌다. 누군가는 재도전을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책을 좋아하는 것과 출판사에서 일하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면 난 작가들이 몹시 부러워 미쳤을 것이다. '나는 왜 작가가 되지 못하는가'라는 자괴감에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차라리 발을 담그지 않고 오래 오래 책을 좋아하는 독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사랑하고 향유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니까. 나는 '고급 독자'의 길을 택하기로 한 거다.

 

그리고 지금, 내게 남은 하나의 꿈이 바로 <동화작가>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른을 일 년 앞둔 올해 초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동화공부를 시작한 곳을, 대학 졸업하면서 찾아갔던 적이 있다. 선생님을 만나 등록절차를 알아보기도 했다. 만약 그때 등록해서 수업을 받았더라면 나는 지금 동화작가가 되어 있었을까?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이미 되어 있었을텐데"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치기 어린 그 시절, 어쩌면 동화를 쓰다 쉽게 지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보다 부족한 경험들을 움켜쥐고 어찌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은 길이므로 후회도 없고 가정법도 어울리지 않는다.

 

동화 공부를 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단편이라고 써본 것도 열 편이 되지 않는다. 걸음마를 갓 뗀 수준이지만, 분명한 건 동화를 쓸 때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신나고 재밌다. 두둑두둑두둑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 안의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게 즐겁다. 완성품은 보잘 것 없을지라도(...) 어쩌면 나는 내가 위로받기 위해 동화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모든 걸 게워낸 후에, 그때야 비로소 아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진정한 동화'가 나올 거라고 그리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나는 쉽게 지칠 것 같다. 지금 나는 심심해서 동화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기에 나아지고 싶은 거다.

 

서른을 앞두고, 내 인생을 곰곰 반추해본다. 결과는 '흡족'이다. 평탄하거나 유복하거나 화려한 삶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내 힘으로 살아나가고 버텨왔다. 그리고 나 인생을 제법 즐겁게 살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후회스럽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길이 두렵지 않다. 행복하다. 그럼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