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백혈병으로 숨진 꽃띠 소녀를 무대에서 만나다
-[연극 반도체 소녀]를 보고 나서

6월 23일, 소셜 놀이터 트위터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타임라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로, 법원이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이숙영씨 유족이 “산업재해를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삼성반도체와 삼성전기에서 일을 하다 백혈병과 혈액암에 걸린 사람은 120여명. 그 중 46명이 세상과 등졌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다니, 충격이었다.

몇몇 보도를 통해 억울한 죽음과 삼성의 비윤리적인 처사에 대해 접해왔지만, 그저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었다. 깊은 정보를 얻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주요 일간지에서는 관련 소식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으며, 포털사이트에서는 연예기사에 밀려 ‘팔리지 않는 뉴스’로 처리될 뿐이었다. 한마디로 반도체 소녀들의 이야기는 ‘차갑게 식은 밥’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삼성반도체 사건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연극 <반도체 소녀>를 통해서였다. 서울 혜화동의 한 소극장. 객석에서 다리를 뻗으면 무대를 침범하는 아주 좁고도 작은 공연장에서 올해 봄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은 문화창작집단 ‘날’의 7번째 공연으로, 입소문을 타며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고 지난 6월 23일에는 재공연에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이 연극을 총 세 번 보았다. 유명한 희곡가가 쓴 작품도 아니고, 유수의 연극제에서 상을 탄 작품도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봐야할 작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핀 뜨거운 불씨를 함께 나누기 위해 지인들의 손을 잡아끌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연극은 대기업 ‘밤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한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큰 눈망울에 작은 체구의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밤성 반도체에 취직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미룬 소녀는 첫 월급으로는 부모님께 내복을 선물하는 착한 딸이었다. 반도체 웨이퍼를 여러 화학약품에 담가 세척하는 일이 소녀의 업무였다. 잔업을 줄이기 위해 소녀는 화장실 갈 시간도 아끼며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2년 뒤,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로 소녀는 말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아 이 세상을 떠나기 싫다고. 스무 살 꽃띠 소녀를 병들게 한 것은 회사였다. 산재신청을 했지만 회사는 ‘증거’를 가져 오라며 윽박질렀다. 어떤 날은 보상금을 받기 위한 수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인생의 반도 채 누려보지 못하고 날개를 꺾어야만 했던 소녀의 삶.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좋을 법한 이야기는 모두 ‘실화’다. 소녀가 다녔던 대기업 ‘밤성’은 기업 ‘삼성’의 연극판 이름이다. 그리고 소녀는 백혈병과 싸우다 세상을 뜬 故 황유미씨의 또 다른 얼굴이다.

<사진: 아츠뉴스>

연극을 처음 본 그날, 객석에는 故 황유미씨의 아버지가 자리해 있었다. 멀리 속초에서 올라왔다는 아버지는 딸 이야기를 하다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사셨을 법한 순박한 얼굴의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울컥 눈물을 쏟았다. 그리곤 작은 체구와 달리 솥뚜껑처럼 큰 두터운 손으로 쓱 눈물을 훔쳤다. 객석에서 하나 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 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노, 그보다 앞선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감히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딸 유미의 장례식에 삼성은 직원을 보내 현금 500만원을 건넸다. 스무 살 딸의 목숨 값이었다. 아버지는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얻기 위해 공영방송사인 KBS를 찾아갔다. 하지만 관계자는 “증거를 갖고 오라”며 삼성과 똑같은 답을 했다. 주저 않고 싶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여럿 언론사를 찾았고 월간 <말>지와 <수원시민신문>을 통해 비로소 딸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참으로 길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그러는 사이 故 황유미씨처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반도체 소녀’들은 늘어만 갔다. 삼성은 피해자와 가족들의 비명소리에 사과는 커녕 귀를 막고 시치미를 뗐다. “우리는 잘 못 없어요. 증거를 가져오라니까요”라며 뻔뻔스레.

연극은 이야기 한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찌든 기업의 도덕적 결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들 역시 또 하나의 반도체 소녀들이라고. 이 연극이 값진 이유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사회의 어둡고 쓰라린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재능교육 문제, 비정규직 문제, 88만원 세대 등 마치 ‘고통의 선물세트’처럼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아픔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자는 것. 이것이 연극이 주는 메시지다. 불편하고 아프지만 그럼에도 보고, 알고, 느껴야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 야만의 시대를 피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크워크에 후기를 쓰고 삼성반도체 피해자들의 모임을 찾아 응원하는 일, 그리고 작은 신념이지만 삼성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데인 마음속의 상처를 잊지 않고 망각하려 할 때마다 들어다 보는 것.

제주에 살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회원 분들은 아마 이 연극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회원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연재기사 혹은 한겨레다큐 ‘삼성백혈병의 진실’ 등을 통해 죽음을 맞이한 꽃띠 소녀들의 아픔을 공감해달라고 말이다.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피어났다면 부디 잊지 않고 살아 달라고. 그게 반도체 소녀들과 가족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야만의 시대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제주 환경운동연합 소식지 <오름과 바당>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