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두번째 사랑 (never forever)

(김진아 감독/베라 파미가, 하정우)

 

 

 

  이 영화의 원제는  'never forever'다. 해석을 하자면 "영원한 것은 절대 없다" 정도 일텐데, 해석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해서인지 한국어판에는 '두번째 사랑'으로 제목을 달리했다.

외국에서 영화공부를 했다는 '김진아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외국에서 모든 촬영을 마쳤다. 여주인공 역시 외국인으로 한국영화에서는 전례가 드믄 케이스다. 참고로 여주인공 '베라 파미가'는(난 왜 이 부분에서 자꾸 '개미 퍼먹어'가 생각날까?^^;) 영화 '디파티드'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여자다.(역시 이쁘구나...쩝)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은 아이를 애타게 원하는 여주인공 소피가 남편과 같은 국적의 불법체류 한국인 지하를 통해 정자를 제공받고 아이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불법체류자인 지하는 ‘차이나타운’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로 여자친구를 외국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불임클리닉’에 한 회에 5달러씩 정자를 팔기 위해 신청하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그마저도 거절당하고 그는 결국 한 회당 300달러를 준다는 소피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드리고 만다. 결국 소피는 임신이 되고 둘 사이의 ‘비지니스 적’인 만남은 ‘사랑’의 단계로 발전한다. 임신을 한 뒤에도 틈틈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둘은 혼란스러워 한다. 그래도 몸과 마음이 이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은 소피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 하지만 소피는 힘들게 얻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남편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는 어린 아들과 함께 만삭인 몸을 이끌고 지하의 방에 걸려있던 바다 풍경 앞에 서있다. 소피가 남편을 떠나 지하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남자를 만났는지 아니면 남편과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피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략 내용은 이러하고, 이 영화를 통해 내가 느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왜 이토록 사람들은 혈연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일까’하는 의문과 둘째는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임 부부의 슬픔’ 따위의 것들이다. 첫째의 경우, 우리나라에 만연하고 있는 ‘핏줄’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연관될 수 있다. 왜 하필 ‘나와 같은 피가 섞인 아이’여야만 하는가. 불임부부를 위해 ‘입양’이라는 제도도 있지 않은가. ‘핏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정자를 사고파는’ 비정상적인 관계까지 형성하게끔 한 것이 아닐까. 사랑의 결실로 이뤄지는 ‘임신’의 과정에 경제적 논리가 개입될 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미학적 행위’가 아닌 ‘기계적 행위’로 인식된다. 몸속에서 피를 뽑듯, 정자를 뽑아 난자와 결합시키면 되는 일이다. 사랑의 감정도, 흥분도 배재된 채 그저 일정한 피스톤 운동만을 할 뿐이다. 사랑의 결실인 ‘임신’과 ‘출산’이 ‘아이’를 얻기 위한 기계적 행위로만 인식될 때, 섹스는 무미건조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그저 똑같은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니. 어찌됐든, 혈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수단과 목적을 상실한 채로 표류하고 있는 한, 이러한 문제는 계속되지 않을까. ‘가족’이 혈연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다양한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 때 좀 더 유연하고 넓은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는 사회문제가 돼버린 ‘불임부부’에 대한 단상. 이 땅의 많은 부부들 중에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예전에 잡지를 통해 읽었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예상했던 것 이상의 통계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달라진 식습관, 패스트푸드의 남용, 환경호르몬의 증가로 인해 우리 몸은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음식, 캔, 플라스틱 등 입을 통해 들어오는 무수한 환경호르몬 입자들은 우리 몸의 정자를 기형으로 변형시키고 자궁벽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리하여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정자와 난자는 서로를 애타게 원하여도 힘이 없어 만날 수 없고 팔 다리가 없어 서로를 끌어안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불임’이 아닐까 한다.

어찌됐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또 한번 하게 됐다. 결혼을 한 이들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겪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 말에 대략 공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죄와벌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2007년 9월28일

 

 '다민족축제'가 열리던 당일 러시아부스에서 O,X퀴즈 3문제 이상을 맞춰서 얻은 상품. '논슬프로그램세계명작'이란다. 그림이 그려져있고 글씨도 크고 읽기 편할 것 같아 골랐다.

  역시나 한시간 반 정도 걸려서 후딱 읽을 수 있었다. 편하고 쉽게 읽히긴 했으나 "원래는 책이 굉장히 두껍다"는 선배 말을 들으니 두꺼운 책을 읽을 것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나 작품의 느낌이나 감흥은 충분히 전달된다. 물론 이 책이 원래 '죄와벌'작품의 '학예회'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ㅋㅋ선배말에 따르면 그렇단 거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영화 '데스노트'가 생각났다. 데스노트에서 사신의 힘을 얻은 주인공은 "세상에 불필요한 인간들을 없애는 것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라고 주장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불쌍한 이들을 착취하며 선량한 이웃을 살해하는 '사회악'인 존재들을 하나 둘 씩 없애고 그는 결국 '21세기 판 영웅'으로 등극한다.

 나폴레옹이나 홍길동 처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많이 가진 이들을 혼내주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점은 처한 입장마다 다르게 변할 수 있는 법. 과연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그들은 영웅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악'이라는 것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선'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이뤄지는 '악'은 과연 '선'이 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선과 악'으로 나눠지는 이분적 사고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됐다. 그리고 과연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문제인가, 라는 생각과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전부는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 역시 얻게 됐다.

 

 이 책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늙은 노파를 살해한다. 그 이유는 노파가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어려운 이들을 착취해 번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논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초인이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는 반드시 필요한 용서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는 초인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였을까, 마음 속으로는 한없이 '나는 괜찮아', '내가 한 일은 잘 한 일이야' 생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굴욕감과 죄책감, 수치심을 느끼며 정신적인 황폐감과 우울증세까지 얻게된다.

 죄를 자백해 투옥된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나쁜 일이 아니며 약한 마음을 가졌던 자신의 나약함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을 죽인 것은 '죄'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는 '소냐'의 한없이 깊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느낀다. 그리고 그 후에 옥에서 나온 후,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떻게 됐을지는...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결코 '사실'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잣대로 인해 우린 '선과 악'을 가늠하고 구분짓는다. 하지만 선과악이 '흑백'처럼 구분지을 수 있는 일일까 과연? 흑과 백 사이의 무수한 회색들의 외침을 알고 있다면 선과 악 사이의 갈팡질팡하는 무수한 감정들을 외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란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며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또한 '선악'의 구도로 결론짓기 힘들다. '선악'을 과연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의 죄역시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2005)/ 창비
저자: 김지우


 지금은 고인이 된 김지우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제3회 창비소설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단다. 그 후, 여기저기에 연재됐던 그녀의 단편작품들을 모아 2005년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올해, 그녀는 뇌부종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처음에 작가의 이름을 들었을 때 '정지우'시인과 헷갈렸고, 그 밖에도 여러 작가와 헷갈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작품은 처음 접해본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워낙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때가 아니니까. 뒤늦게 모 선배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누군지도, 어떤 작품을 담았는지도 모르고서 책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깊숙이 빠져들었던 것은 그녀 특유의 문체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요즘 물살을 타며 떠오르고 있는 다른 여류작가들과는 문학적 색채가 다른 것 같다. 전경린 류의 난해하고 추상적인 미화어구와 달리 김지우는 토속적 문체가 강해 매끄럽게 읽힌다.(물론 전경린의 문체를 흉보는 건 아니다. 그녀 소설에 나오는 비유는 받아적을 만큼 훌륭한 것이며 소설을 통해 바라보는 그녀의 내면적 세계는 놀라울 만큼 대단하니까.)

 어찌됐든 다른 여류작가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매끄럽게 읽히고 이야기의 구조 역시 단순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시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구도가 아닌 읽으면서 전반적인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구조다. 그래서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투리를 사용한 토속적 어구, 해학적인 언어도 돋보인다. 읽다보면 인물들에게 정이 어리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이 난다. 그 사투리가 섞인 대사가 촌스럽다기 보단 따뜻하다. 욕설하나도 무진장 정감어리기 때문에.

  그녀의 글엔 겉치장이나 억지스런 꾸밈이 없어 좋은 것 같다. 소설 하나하나 극중 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간다는 것도 장점인 듯 싶다. 결말 역시 '끝'이나 어떤 상황의 제시가 없다. 다른 소설들을 읽다보면 친절하리만큼 설명을 하거나 아주 난해하게 끝을 맺는데 그녀의 소설은 끝마저도 평범하다.

 극의 전개를 끝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놓는 끝맺음. 마치 장편소설인 듯 싶게 뒤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그러하다. 그래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뒷 이야기에 대한 상상은 각자가 하기 나름이지만 몇몇 이야기는 과연 결말이 어떻게 이뤄졌을지 몹시 궁금타. 몇몇 작가들이 전작을 이어 후작을 내놓듯, 그런 기대감을 그녀에게 가져보지만 끝내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기에.

  이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만이 '김지우'라는 작가에 대해 고작 "알고 있다"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슴치 않고 "아까운 작가를 한 명 떠나보냈다"고 말할 수 있는건 그만큼 그의 소설이 내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아주 편안하게 말이다. 아주 깊게 기억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저 멀리 내팽겨쳐버리도 않을 책이다. 그녀를 저세상에 보낸 사실이 새삼스레 가슴 아픈 건 그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든 소설의 "뒷 애기가 매우 궁금하다"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모두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이글은 2007년도에 작품을 읽은 후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소설의 내용은 가물가물합니다만, 기록한 글이기에 고스란히 새로운 둥지인 이곳에 옮겨 적습니다. 생각난 김에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 김지우 소설가(1963년-2007년 3월 24일)


김지우 작가는 196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0년 단편소설 〈눈〉으로 제3회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2005년 소설집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를 펴냈다.

길지 않은 활동 기간 동안 김지우씨는 대체로 변방의 보잘것없는 인물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뚝심과 고집을 소설에 담아 와 주목을 받았다.

2007년 44세의 나이로 뇌부종을 앓은지 한달 만에 숨을 거뒀다.

2011년 4월에는 동료 문인들이 고인의 묘비를 세워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고창의 묘소 앞에 세웠단다. 선배 소설가 현기영씨가 ‘젊은 작가 김지우 여기에 누워있다 자비로운 햇빛이여, 이 무덤 따뜻하게 하소서’라는 묘비명을 썼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