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오늘> (A Reason of live)
감독: 이정향/ 주연: 송혜교, 남지현, 기태영, 송창의


이정향 감독의 9년 만의 신작

영화 <오늘>은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를 만든 이정향 감독이 9년만에 들고 나온 작품이다. 그동안 뜸해도 너무 뜸했다. 떠들썩한 흥행작을 만들어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만들어온 작품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안겨주며 '따뜻한 영화'로 회자되곤 했다. 앞선 두 작품에는 이정향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그런 서정의 세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집으로>를 들고 나온 9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계에 여성 감독은 매우 귀할 때였다. 그래서 그녀는 '주목받는 여류 감독'에 늘 이름을 올리곤 했다. 자칭 '영화광'이었던 나는 내심 그녀를 응원했더랬다.

송혜교의 주연작이라는 것만큼이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9년만의 신작이라는 점이 영화를 보고 싶게끔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는 예매전쟁에서 밀려 보지 못한 터였다. 그래서 더더욱 보고 마리라 벼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기 전, 줄거리와 평론가 평을 참고 했다. '용서'에 관한 영화라는 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주제가 제법 묵직하겠구나' 생각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정향 감독 특유의 세밀하고도 섬세한 감정 묘사도 여전했다.

사과 한 번 하지 않는 가해자. 과연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영화는 교통사고로 생일날 약혼자를 잃게 된 다큐멘터리 PD 다혜(송혜교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다혜의 약혼자 상우(기태영 분)는 술에 취해 전화가 걸려온 친구 지석(송창의 분)을 만나러 갔다가 오토바이에 치여 숨진다. 가해자는 고등학생 소년. 살아 숨쉬는 상우를 두어번 오토바이로 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악의를 품고 있는 소년이다. 다혜는 약혼자를 잃고 힘들어하지만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하고 탄원서를 써 준다.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다혜는 '용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살인, 강간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받은 사람들 중,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당사자 혹은 가족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는 기획물이었다. 다혜의 작업은 깊은 신앙심과 수녀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다혜는 지석의 여동생인 고등학생 지민(남지현 분)을 통해 끊임없이 '용서'에 대한 다른 의견을 듣게 된다. 피해자들이 과연 가해자들을 진심으로 용서했는가에 대한 물음과 가해자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다혜는 지민을 통해 혼란을 겪는다.



더군다나 가해자를 용서했다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던 중, '용서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사람들을 만나며 다혜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살인으로 남편을 잃고 동네에서 작은 점빵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한 아줌마는 심지어 용서를 되물리고 싶다고 말한다.

"처음엔 그를 용서했지요. 그런데 그는 나에게 찾아와 한번도 사과한 적 없어요. 출소 후 잘 살고 있을 가해자를 보며 지금은 용서한 것을 되물리고 싶어요. 용서 취소할래요, 취소"라는 인터뷰이의 말을 듣자 다혜는 그만 카메라의 전원을 꺼버린다.

다혜는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용서한 그 소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다혜에게 소년이 또 한번 살인죄를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약혼자를 죽이기 전 소년이 지엄마를 칼로 찌른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알게 된다. 다혜는 소년을 용서한 자신을 참을 수가 없다. 자신의 용서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한 빌미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 때문에. 그리고 어렵사리 내어 준 '용서'가 값어치 없이 쓰레기통에 내팽개쳐졌다는 분노에.

혼란을 겪는 다혜에게 수녀는 말한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 그를 용서하자. 용서해야만 한다"라고. 다혜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지만, 그러나 정작 자신의 상처는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가해자는 사과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다혜는 갑자기 울분을 참을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떠올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떠올렸다. 그려내는 방식의 세기만 다를 뿐, 영화는 집요하게 '죄'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은 신애(전도연 분)는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통해 치유받고자 한다. 진심으로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성실한 교인으로 변해가던 주인공은 어느날 가해자를 면회갔다가 혼란을 겪게 된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가해자의 얼굴이 온화하고 평온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말한다. "하느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 자신을 품어 주셨다. 자신을 내려놓고 죄를 빌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신애는 소리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살인자를 용서할 자격이 있냐고. 나의 고통은 어찌할 것이냐고. 울부짖는 주인공을 보며 그동안 생각했던 '용서'에 대해 다시 의문을 갖고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순간, 종교도 '폭력'이 되어버리고 말겠구나, 하는 깨달음.

이정향 감독의 <오늘>역시 종교를 배경에 두고 '용서'에 관해 이야기 한다. 영화는 진정한 용서는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해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이 세상을 뜬 피해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도 아닌 살아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리고 용서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강조한다.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말고 시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기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카피 '너무 일찍 용서해서 미안해'라는 카피는 주인공 다혜가 자신을 위로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용서를 한 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다혜는 마침내 "가해자들이 보야야 할 다큐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즉, 용서를 하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혜의 선언은 이정향 감독을 통해 이 영화에서 실현된다. 영화는 가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이야기 하며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말한다. 

엔딩 무렵, 다혜와 신부님이 나눈 대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미사시간,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하는 신부님께 다혜는 대뜸 질문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저를 용서해주시는 건가요? 이렇게 용서를 받으면 다 되는 것인가요?"라고 묻자 신부님은 "하느님이 이렇게 용서해주셨듯이 자매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면 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혜가 신부의 말처럼 아무런 대가없이 '용서'를 하게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영화는, 내게 세 가지의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 줬다. 이것만으로도 120여분의 긴 러닝타임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1) 피해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는 것. 상처를 주었으면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2)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 그 중에서도 한국을 바라본다면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그 속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들을 우주인들은 참 귀엽게 보고 있을 거라는 것. 그러니까 부디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넓게 넓게 살자는 것.

3) 나의 오늘은 누군가에겐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라는 것.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게 다가오는 깨달음) 


물론 아쉬움도 많다. 일단은 다소 긴장감이 덜한 전개 방식이나 노골적으로 주인공 혹은 감독의 생각을 강요하는 듯한 메시지 전달. 그리고 몇몇 장면의 순서가 뒤죽박죽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편집. 물론, 이런 모든 걸 파악하기엔 전문성이 없는 관계로 '약간의 아쉬움'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무엇보다 이정향 감독의 신작을 기다렸던 나에겐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였으니까.

[p.s] 영화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섞여 있다. <소년범의 재범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현실> <피해자의 인권> <사형제 폐지> <아동 학대> 등에 대해 생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