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제주 고산농협의 농산물 브랜드 '흙토랑'의 캘리그라피 작업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별 걸 다하네"라는 생각이 다 드는데요.

알고보면 2015년에 작업한 결과물 입니다. ^^

 

 

요즘 열심히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면서, 그동안 해왔던 작업물들을 전부 올리고 말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실행하고 있어요. 출산 후에는 더더욱 정신 없어서 아마 소소한 작업물들은 다 잊어버릴 듯 해서요. (1월 출산 예정이거든요.)

 

한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적에 전문기관에서 '캘리그라피' 수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작심삼일형'인 저는 딱 '입문 과정'만 밟고, '작가 과정'은 포기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워요. 그때 포기한 이유가 스스로의 오지랖에 대한 반성이긴 했지만 실은 그보다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꽁한 게 있어서 그랬거든요.(유치찬란 했지요) 가끔씩 '그때 끝까지 공부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캘리그라피 역시 연습하지 않으면 낡습니다. 결국 저는 그때 실력보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상태인데요. 그래도 소소한 개인적인 작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없답니다. 이 잔기술로 셀프 청첩장 문구도 입력하고, 친구 청첩장도 만들어주고 그랬지요.

 

 

 

이 작업은 대학 동기의 부탁으로 작업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언짢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무보수' 그야말로 '재능기부' 였거든요. 처음부터 '재능기부'로 알고 시작했던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야물지 못했지요. 어떤 일을 맡을 때, 당당히 페이를 물어보는 걸 어렵게 여겼던 거예요.(맞아요, 호구였어요.)

 

그래서 일단 '선 작업'부터 해서 넘겼는데, 그 후 연락이 없더라고요. 박스에 네이밍이 새겨져 이미 시판된 것을 제가 나중에 발견했습니다.  친구는 연락도 없었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했더니 "친구 사이에 돈 받는 걸 부담스러워 할까봐 제주에 놀러오면 밥 사주려고 했다"고 말하더군요. 재능의 값이 밥 한끼라니요. 하지만 이후, 제가 결혼을 한다고 알렸는데도 친구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밥 역시 얻어먹어보지 못했지요. 물론, 제주에 내려갈 적에 연락하지도 않았고요.

 

우연히 검색해보니 아직도 제 캘리그라피가 상품에 인쇄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네, 저는 '저작권'도 지키지 못한 호구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포스팅을 해둔답니다. 그래도, 캘리그라피를 보면 기분이 좋아요. 내 안에서 나온 작품이니 아무리 못나도 이쁜 것이지요. 나름, '흙'의 거친 느낌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주려고 노력해서 작업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만족한답니다.

 

 

작가는 어떤 작업이든 늘 공 들여 하기 마련입니다. 결과야 어찌됐든 '대충' 작업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작가들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작가들의 노력을 '열정페이'로 가져가려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 합니다.

 

페이도 받지 못하고, 이후 진행사항도 듣지 못한 이 경험을 통해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 사람을 보는 눈. 둘, 다시는 열정페이 따윈 없다. 즉, 어떤 작업이든 제 공이 들어가는 일은 적당한 페이를 받기 시작한 것이지요. '재능기부'는 제가 마음 내킬 때 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 밥그릇은 제가 지켜야겠지요. 세상은 냉혹하니까요. 이렇게 세상의 냉정함을 맛보며 성장 중입니다. ^^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칠곡군 북삼읍 숭오1리 '마을 스토리텔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태평 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금오산 자락에 위치한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옛부터 물이 좋아 벼농사도 잘 되고, 인심 또한 넉넉해서 여러모로 풍요로운 마을이었다고 하네요. '태평 마을'이라는 이름에 딱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지자체에서 마을을 다시 살리고 관광객들을 유입시키기 위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스토리텔링'을 도입하는 추세인데요. 태평 마을 역시 관련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은 마을의 오래된 곡식 창고를 카페로 만들어서 공연 등의 문화행사도 열고, 타지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곡식 창고를 리모델링한 '마을 카페'는 내년 완성될 예정인데요, 그에 앞서 마을의 자원을 찾아 스토리텔링하는 작업에 저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창고에 이런 낙서가... *.* 귀여워서 찍었지요.

 

제가 담당한 작업은 '빨래터 합창단'의 공연 대본을 쓰는 것과 마을 홍보 등의 자료로 쓰일 '마을의 스토리'를 발굴해서 스토리텔링 하는 것입니다.  마을의 스토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마을에 어떠한 자원들이 존재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전조사를 위해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벚꽃 나무가 쭉 늘어서 있는 길을 따라가다보면 '마을회관'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대부분 70~80대 어르신들이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우리나라 농촌은 점점 노령화되는 추세입니다. 태평 마을 역시 경제활동이 가능한 40~50대 층은 출근을 하거나 일을 하는 까닭에 마을회관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지키고 계셨지요. 학교 수업을 마친 귀여운 초등학생 손주, 손녀들도 보였고요. 아마 다른 농촌 마을의 풍경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브레인스토밍 등의 작업을 통해 마을의 자원을 조사했습니다. 태평 마을의 대표 자원을 뽑아내니 대략 4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한글교실 할머니들로 구성된 '빨래터 합창단',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마을 빨래터', 마찬가지로 120여년의 역사를 지닌 '숭오 교회', 곡식 삼천 가마니 이상이 보관되었다는 '마을창고' 이지요.

 

모든 자원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문화와 역사만큼은 매우 탄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원 조사와 더불어 각 자원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도 조사해 정리했습니다.

 

 

그 중, '빨래터 합창단'은 이미 지역의 유명인사였습니다. 평균 연령 70세로 된 할머니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실제로 할머님들이 아낙이었던 시절, 동네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며 불렀던 이른바 '노동요'를 합창으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냥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닌, 스토리를 입혀 '연극' 형식으로 공연도 하고 계셨답니다. 총 지휘자이자 연출자는 한글교실 선생님! 우연히 할머님 한 분이 부르는 노래를 선생님이 귀담아 들었다가, 공부가 힘들거나 지겨울 때마다 합창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렇게 합창단이 꾸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악보만 있을 뿐, 공연 대본은 전무한 상태여서 스토리텔링의 일환으로 제가 직접 '대본'을 작성하게 됐습니다.

 

 

 

동네에 실제로 이렇게 빨래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음 빨래터'라는 팻말 아래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을 씻고 가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네요. 본격적인 마을스토리텔링 사업을 하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스토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마을이었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엄지 척!

 

예전에는 흙바닥에 돌덩이가 의자처럼 드문드문 놓여 있었는데, 새마을사업을 통해 지금처럼 시멘트가 발린 모습으로 변했다고 하네요. 예전 정취를 느낄 수 없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마을의 '숭오 교회'는 칠곡 지역 최초의 교회라고 합니다. 작은 마을에서 한 교회가 100년 넘는 전통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은데, 이곳에는 대다수의 주민이 교인일 정도로 기독교의 가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독립운동의 기지이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속에서도 교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일제 치하 속에서도 믿음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런 내용 역시 스토리텔링의 큰 줄기가 될 수 있겠지요. 현재 교회는 새롭게 증축한 건물로, 앞편에 옛날 교회 건물도 남아 있었습니다. 황구 녀석이 교회를 지키고 있네요. 아마 아까 마을회관 낙서에 나온 그 녀석인가 봅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한창 푸르른 여름에 사전 조사를 마쳤습니다. 이후, 수집한 '마을 자원'을 토대로 마을 스토리를 발굴했고, 그 내용을 원고로 작성했습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읽을 수 있도록 재밌는 이야기와 쉬운 문장으로 구성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동화'의 형식을 따르게 됐습니다. 원고는 11월 말에 완성하여 현재 책으로 제작 중입니다.

 

그동안 '스토리텔링' 관련하여 다양한 강연과 작업을 진행했지만, 직접 마을 스토리를 발굴해 동화로 쓰고, 책으로 엮는 작업은 처음 참여했습니다. 사전 조사는 물론이고, 기획회의를 거쳐 구성을 잡고 스토리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보람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엿들었을 때는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모든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지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원고가 완성됐을 때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답니다.

 

완성한 스토리는 책으로 발간되어 내년 '마을 카페'에 비치되고, 마을을 홍보하는 귀한 자료로 쓰일 예정입니다. 완성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요? 책으로 완성되는 즉시, 제 블로그에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마을에 미팅을 갔을 때, 할머니 한 분이 챙겨주신 '복조리'. 직접 만드신 거랍니다. 받고 나서 어찌나 기쁘고 행복하던지요. 복조리는 우리 집 안방에 잘 걸어두었답니다. 복이 절로 들어오는 것 같아요 ^^

 

 

 

 

 

<6> 딸에게 쓰는 편지

 

축복아, 정말 오랜만에 노트를 꺼냈어. 엄마는 정말 게으른가 봐. 그동안 항상 이런 고민을 했단다.  '블로그에 일기를 올릴까? 아니면 여기 노트에 적을까?' 하고 말이야. 뭐, 쓸데 없는 고민들이지.

 

엄마에게는 20대에 쓴 일기장이 10여권 있어. SNS에 올리는 것들은 사라지기 쉽고 휘발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종이 일기장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참 좋더라. 물론, 잃어버릴 수도 있고 변덕 때문에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다행히 서랍 속에 잘 들어 있단다. 어쩌다 가끔씩 그 일기장들을 들춰 봐. 그 안에는 치열하고, 방황하고, 아팠던 20대 시절의 엄마가 고스란히 들어 있단다. 엄마는 힘든 시간을 잘 견뎌준 과거의 내가 참 대견하고 기특하지만, 때로는 그때의 일들이 떠올라 아플 때가 많아. 엄마는 유독 심한 '성장통'을 겪었는데, 우리 딸은 엄마보다는 덜 아팠으면 좋겠다. 물론, 아픈만큼 성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겪지 않아도 될 일은 그냥 건너 뛰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아무튼, '종이 일기장'만이 갖고 있는 '아날로그의 힘'을 기억하며 이 일기장을 마련했는데 일기 쓰는 게 '한달에 한번 쓰는 이벤트'가 되어 버렸으니 원. 뭔가를 꾸준히 하는 건 쉽지 않구나. 네가 태어나면 그때는 육아일기를 꾸준히 적고 싶은데 가능할까? 단 다섯 줄을 적더라도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적어도 100일까지는 매일 기록하고 싶구나.

 

우리 딸, 벌써 29주 3일째다. 엄마는 요 며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배가 커져서인 듯 해. 트림을 하면 신물이 올라오지. 예정일까지 아직 두 달 넘게 남았는데 그땐 어쩌려고 벌써 이러는지 모르겠다. 외할머니와 통화하면서 속이 불편하다고 했더니 외할머니가 "다 그렇게 하며 애낳는 거야"라고 대답하셨단다. 아, 정말 그렇겠구나. 나는 그동안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고생을 손꼽만큼도 헤아리지 못했단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단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겪기 전에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늘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는 일은 많이 줄어들텐데 말이야. 엄마는 그동안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겪어보니 그렇지 않더라. 경험만큼이나 직접적으로 새겨지는 건 없지. 임신을 하고 엄마는 제2의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오늘은 너의 큰 외삼촌이 2년 간 준비한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합격한 날이야. 그동안의 노력을 알기에 정말 기뻤단다. 외삼촌이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회사가 어려웠을 때고, 퇴근 후 독학으로 공부를 했어. 그렇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고, 겨우겨우 감을 잡을 때 즈음 컨디션 난조로 수술도 하고 입원도 하면서 결국 문제 한 개 차이로 시험에서 떨어졌지. 그리고 올해, 학원까지 다니며 다시 도전했어. 정말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보면 성적이 나오지 않아 혼자 자책도 많이 했단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고생했고 말이야. 그런데 마침내 합격했어. 노력은 결국 배신하지 않더라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 난생 처음 진지하게 '공부'라는 걸 해보며 스스로 '돌머리'라고 자책도 많이 했지. 그런데 이번 경험을 통해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거야. 오빠가 자신을 더이상 책망하지 않아도 되니, 엄마는 그것만으로 기쁘단다.

 

엄마는 외삼촌이 오빠라서 정말 좋단다. 혼도 많이 나고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외삼촌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어. 우리집의 가장이자 아빠였지. 엄마보다 딱 5살 많을 뿐인데, 항상 아빠 같은 역할을 했단다. 그에 비하면 엄마는 늘 어리광쟁이였어. 항상 오빠에게 손 벌리고, 도움을 받기만 했지. 외삼촌은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반 때 조선소에 현장실습을 나갔어. 다른 친구들 모두 힘들어서 내려왔는데, 네 외삼촌 혼자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았단다. 외삼촌의 끈기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엄마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포기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했던 거야. 가족을 위해. 꼭, 70~80년대 이야기 같지만, 엄마와 외삼촌, 이모는 어릴 적에 또래가 겪지 못할 어려움을 많이 겪었단다.

 

외삼촌은 설계 기술이 남보다 뛰어났어. 그렇게 조선소에서 배의 도면을 그리고 설계하며 오직 실력으로 살아남았지. 주경야독하며 야간대학도 졸업하고, 그렇게 20년동안 열심히 일했단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딸도 둘이나 낳고 말이야. 조선업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던 주요 분야였는데 요 몇년 간,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 사양사업이 되어 버렸어. 외삼촌이 다니던 조선소는 지역에서 말만하면 알아주는 회사였는데, 결국 위기를 맞고 만 거야. 외삼촌은 선택해야 했지. 회사를 지켜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나? 하지만 전혀 비전이 없더래. 결국 외삼촌은 희망퇴직을 결정했고, 제2의 인생으로 다른 길을 모색했단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냈어. 앞으로 네 외삼촌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펼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동안 가족들에게 많이 희생했으니까 말이야. 엄마는 네 외삼촌을 생각하면 열심히 살게 된단다. 우리 축복이도 멋진 외삼촌이 있다는 걸 항상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오늘 '방과후 수업'을 다녀왔단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시작했던 수업이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 작년 10월 회사를 관뒀을 때, 주변에서 방과후 교사 경력이 있는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 길을 알려주셨어. 동화작가로서 아이들의 세계도 알 수 있고, 시간 대비 페이도 괜찮은 꽤 좋은 직업이라고 말이야. 그 말에 엄마는 자격증도 경력도 없으면서 '맨땅에 헤딩'을 했단다. 물론, 이 길을 소개해준 선생님의 도움이 컸어. 교재 선택이며, 제안서 작성 방법이며 많은 것을 도움 받았거든. 총 3군데에 지원해서 한 곳은 떨어졌고, 한 곳은 면접까지 봤고, 한 곳은 합격했어. 처음에는 굉장히 망설였지만,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단다. 귀한 아이들을 많이 만났거든. 정말 안 예쁜 아이들이 없단다. 학생들을 통해서 매주 에너지를 얻고, 위안을 얻었어. 그리고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깨닫게 됐지.

 

1년이 아직 안 되었지만, 그 사이에 수강생도 많이 늘었어. 또, 학생들도 이곳저곳에서 글쓰기 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았단다. 엄마도 뿌듯하게 즐겁게 일하고 있고 말이야. 12월 셋째주까지는 일할 계획인데 우리 축복이가 예정대로 1월에 태어나 준다면 참 좋겠다. 지금까지 엄마 힘들지 않게 뱃속에서 씩씩하고 건강하게 지내주고 있는데,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엄마는 막달까지 언니 오빠들과 책임감 있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도와줄 거지? 내년에도 아빠의 협조로 1년 간 수업을 더 해볼까 생각 중이야. 벌이는 둘째치고 엄마 적성에 맞고, 아이들도 참 예쁘거든.

 

지난 월요일에는 축복이를 만나러 병원에 다녀왔어. 원래는 토요일인 오늘이 정기검진일인데, 지난주 무리를 했는지 일요일부터 피가 비췄단다. 분홍빛 피였지. 다행히 통증이 없어서 집에서 쉬었는데, 월요일에도 여전했지. 그래서 조퇴한 내 아빠랑 함께 병원에 다녀왔단다. 병원에서 내진, 초음파검사, 태동검사를 받았어. 다행히 우리 축복이, 나 둘다 건강하대.

 

사실 그동안 엄마가 임산부인데도 너무 씩씩기하긴 했지. 소양증 말고는 크게 힘든 게 없어서 너무 자만했던 거야. 일도, 강연도 평소처럼 다 맡아서 했으니까. 불면증이 심할 때는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또 걷기도 많이 걷고 말이야. 지난 주 금요일에는 서울에서 '청소년 진로체험' 강사로 일하게 되어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야외에서 '동화작가 부스'를 운영했단다. 전날 서울에 올라가서 전시회도 보고 세진 이모 만나서 서촌 일대를 엄청 돌아다니고 재밌게 놀았지. <있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전시회도 보고 말이야. 그런데 그날 세진 이모네 집에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단다. 자리가 바뀌어서 그랬나 봐. 결국, 다음날 비몽사몽 상태로 야외에서 겨우겨우 버텼어. 또, 다음 날에는 아빠 친구들과 가족 동반 여행으로 청도에서 1박을 보냈지.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피가 비추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강의 신청이 왔을 때, 출산 전 마지막 서울행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허락했어. 마음 같아서는 바람 쐬러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싶지만 돈도 그렇고 할 일도 있고, 일부러 일을 벌이지 말자 생각하며 자제했었지. 엄마가 겪은 바로는 놀러가기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강연 찬스'란다. 신기하게도 블로그를 통해 강연 신청이 왔고, 강연료에 교통비까지 지원해 주신다길래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기회를 물었지. 이번 서울행도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다녀왔단다.

 

몸은 고됐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일까, 다행히 울 축복이가 건강하다고 해서 엄마는 무척 기쁘단다. 심지어 머리와 배 크기가 주수보다 2주나 크대. 또, 초음파 통해서 울 축복이 얼굴도 봤지. 꼭 창문에 얼굴을 꾹 눌러댄 것 같았어. '아기공룡 둘리' 같은 얼굴이었지. 원래 초음파로 보면 아기들은 못생겼대. '입체 초음파'를 하면 좀 다르다던데, 엄마랑 아빠는 입체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건 필수 검사는 아니고, 그냥 아기 얼굴을 보는 게 목표라고 하더라. 이미 25주에 정밀 초음파 통해서 우리 축복이 건강한 걸 확인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싶어. 입체초음파를 하는 동안 밝은 빛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엄마 아빠는 그건 건너뛰기로 했단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지만 엄마 아빠 닮겠지, 누구 닮겠니? 그치?

 

가끔 네가 무척 보고 싶다. 아빠도 그렇대. 축복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얼른 보고 싶다셔. 아무리 그래도 엄마 뱃속에서 충분히 있다가 약속한 그 날에 만나자. 알았지? 정말 사랑한다, 우리 딸.

 

처음에는 '건강만 하렴' 생각했다가 최근에는 '엄마, 아빠 예쁜 곳만 닮아 태어나렴' 하며 욕심을 갖게 돼. 하지만 말이야,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건 무조건 건강이야. 우리 축복이가 이 세상에 축복처럼 기적처럼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축복이가 어떻게 생겼든 우릴 닮을 내 딸, 우린 정말 너를 사랑하고 응원할 거야. 사랑한다. 끝까지 널 지켜줄게. 건강히 놀다가 만나자.

 

29주 3일된 딸에게

엄마가

 

아빠 친구들 가족과 함께 떠난, 1박 2일 청도 여행.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에서 찍은 아빠와 엄마, 축복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