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6> 딸에게 쓰는 편지

 

축복아, 정말 오랜만에 노트를 꺼냈어. 엄마는 정말 게으른가 봐. 그동안 항상 이런 고민을 했단다.  '블로그에 일기를 올릴까? 아니면 여기 노트에 적을까?' 하고 말이야. 뭐, 쓸데 없는 고민들이지.

 

엄마에게는 20대에 쓴 일기장이 10여권 있어. SNS에 올리는 것들은 사라지기 쉽고 휘발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종이 일기장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참 좋더라. 물론, 잃어버릴 수도 있고 변덕 때문에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다행히 서랍 속에 잘 들어 있단다. 어쩌다 가끔씩 그 일기장들을 들춰 봐. 그 안에는 치열하고, 방황하고, 아팠던 20대 시절의 엄마가 고스란히 들어 있단다. 엄마는 힘든 시간을 잘 견뎌준 과거의 내가 참 대견하고 기특하지만, 때로는 그때의 일들이 떠올라 아플 때가 많아. 엄마는 유독 심한 '성장통'을 겪었는데, 우리 딸은 엄마보다는 덜 아팠으면 좋겠다. 물론, 아픈만큼 성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겪지 않아도 될 일은 그냥 건너 뛰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아무튼, '종이 일기장'만이 갖고 있는 '아날로그의 힘'을 기억하며 이 일기장을 마련했는데 일기 쓰는 게 '한달에 한번 쓰는 이벤트'가 되어 버렸으니 원. 뭔가를 꾸준히 하는 건 쉽지 않구나. 네가 태어나면 그때는 육아일기를 꾸준히 적고 싶은데 가능할까? 단 다섯 줄을 적더라도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적어도 100일까지는 매일 기록하고 싶구나.

 

우리 딸, 벌써 29주 3일째다. 엄마는 요 며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배가 커져서인 듯 해. 트림을 하면 신물이 올라오지. 예정일까지 아직 두 달 넘게 남았는데 그땐 어쩌려고 벌써 이러는지 모르겠다. 외할머니와 통화하면서 속이 불편하다고 했더니 외할머니가 "다 그렇게 하며 애낳는 거야"라고 대답하셨단다. 아, 정말 그렇겠구나. 나는 그동안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고생을 손꼽만큼도 헤아리지 못했단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단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겪기 전에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늘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는 일은 많이 줄어들텐데 말이야. 엄마는 그동안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겪어보니 그렇지 않더라. 경험만큼이나 직접적으로 새겨지는 건 없지. 임신을 하고 엄마는 제2의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오늘은 너의 큰 외삼촌이 2년 간 준비한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합격한 날이야. 그동안의 노력을 알기에 정말 기뻤단다. 외삼촌이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회사가 어려웠을 때고, 퇴근 후 독학으로 공부를 했어. 그렇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고, 겨우겨우 감을 잡을 때 즈음 컨디션 난조로 수술도 하고 입원도 하면서 결국 문제 한 개 차이로 시험에서 떨어졌지. 그리고 올해, 학원까지 다니며 다시 도전했어. 정말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보면 성적이 나오지 않아 혼자 자책도 많이 했단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고생했고 말이야. 그런데 마침내 합격했어. 노력은 결국 배신하지 않더라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 난생 처음 진지하게 '공부'라는 걸 해보며 스스로 '돌머리'라고 자책도 많이 했지. 그런데 이번 경험을 통해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거야. 오빠가 자신을 더이상 책망하지 않아도 되니, 엄마는 그것만으로 기쁘단다.

 

엄마는 외삼촌이 오빠라서 정말 좋단다. 혼도 많이 나고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외삼촌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어. 우리집의 가장이자 아빠였지. 엄마보다 딱 5살 많을 뿐인데, 항상 아빠 같은 역할을 했단다. 그에 비하면 엄마는 늘 어리광쟁이였어. 항상 오빠에게 손 벌리고, 도움을 받기만 했지. 외삼촌은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졸업반 때 조선소에 현장실습을 나갔어. 다른 친구들 모두 힘들어서 내려왔는데, 네 외삼촌 혼자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았단다. 외삼촌의 끈기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엄마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포기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고 했던 거야. 가족을 위해. 꼭, 70~80년대 이야기 같지만, 엄마와 외삼촌, 이모는 어릴 적에 또래가 겪지 못할 어려움을 많이 겪었단다.

 

외삼촌은 설계 기술이 남보다 뛰어났어. 그렇게 조선소에서 배의 도면을 그리고 설계하며 오직 실력으로 살아남았지. 주경야독하며 야간대학도 졸업하고, 그렇게 20년동안 열심히 일했단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딸도 둘이나 낳고 말이야. 조선업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던 주요 분야였는데 요 몇년 간,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 사양사업이 되어 버렸어. 외삼촌이 다니던 조선소는 지역에서 말만하면 알아주는 회사였는데, 결국 위기를 맞고 만 거야. 외삼촌은 선택해야 했지. 회사를 지켜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나? 하지만 전혀 비전이 없더래. 결국 외삼촌은 희망퇴직을 결정했고, 제2의 인생으로 다른 길을 모색했단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냈어. 앞으로 네 외삼촌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펼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동안 가족들에게 많이 희생했으니까 말이야. 엄마는 네 외삼촌을 생각하면 열심히 살게 된단다. 우리 축복이도 멋진 외삼촌이 있다는 걸 항상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오늘 '방과후 수업'을 다녀왔단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시작했던 수업이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 작년 10월 회사를 관뒀을 때, 주변에서 방과후 교사 경력이 있는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 길을 알려주셨어. 동화작가로서 아이들의 세계도 알 수 있고, 시간 대비 페이도 괜찮은 꽤 좋은 직업이라고 말이야. 그 말에 엄마는 자격증도 경력도 없으면서 '맨땅에 헤딩'을 했단다. 물론, 이 길을 소개해준 선생님의 도움이 컸어. 교재 선택이며, 제안서 작성 방법이며 많은 것을 도움 받았거든. 총 3군데에 지원해서 한 곳은 떨어졌고, 한 곳은 면접까지 봤고, 한 곳은 합격했어. 처음에는 굉장히 망설였지만,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단다. 귀한 아이들을 많이 만났거든. 정말 안 예쁜 아이들이 없단다. 학생들을 통해서 매주 에너지를 얻고, 위안을 얻었어. 그리고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깨닫게 됐지.

 

1년이 아직 안 되었지만, 그 사이에 수강생도 많이 늘었어. 또, 학생들도 이곳저곳에서 글쓰기 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았단다. 엄마도 뿌듯하게 즐겁게 일하고 있고 말이야. 12월 셋째주까지는 일할 계획인데 우리 축복이가 예정대로 1월에 태어나 준다면 참 좋겠다. 지금까지 엄마 힘들지 않게 뱃속에서 씩씩하고 건강하게 지내주고 있는데,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엄마는 막달까지 언니 오빠들과 책임감 있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도와줄 거지? 내년에도 아빠의 협조로 1년 간 수업을 더 해볼까 생각 중이야. 벌이는 둘째치고 엄마 적성에 맞고, 아이들도 참 예쁘거든.

 

지난 월요일에는 축복이를 만나러 병원에 다녀왔어. 원래는 토요일인 오늘이 정기검진일인데, 지난주 무리를 했는지 일요일부터 피가 비췄단다. 분홍빛 피였지. 다행히 통증이 없어서 집에서 쉬었는데, 월요일에도 여전했지. 그래서 조퇴한 내 아빠랑 함께 병원에 다녀왔단다. 병원에서 내진, 초음파검사, 태동검사를 받았어. 다행히 우리 축복이, 나 둘다 건강하대.

 

사실 그동안 엄마가 임산부인데도 너무 씩씩기하긴 했지. 소양증 말고는 크게 힘든 게 없어서 너무 자만했던 거야. 일도, 강연도 평소처럼 다 맡아서 했으니까. 불면증이 심할 때는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또 걷기도 많이 걷고 말이야. 지난 주 금요일에는 서울에서 '청소년 진로체험' 강사로 일하게 되어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야외에서 '동화작가 부스'를 운영했단다. 전날 서울에 올라가서 전시회도 보고 세진 이모 만나서 서촌 일대를 엄청 돌아다니고 재밌게 놀았지. <있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전시회도 보고 말이야. 그런데 그날 세진 이모네 집에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단다. 자리가 바뀌어서 그랬나 봐. 결국, 다음날 비몽사몽 상태로 야외에서 겨우겨우 버텼어. 또, 다음 날에는 아빠 친구들과 가족 동반 여행으로 청도에서 1박을 보냈지.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피가 비추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강의 신청이 왔을 때, 출산 전 마지막 서울행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허락했어. 마음 같아서는 바람 쐬러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싶지만 돈도 그렇고 할 일도 있고, 일부러 일을 벌이지 말자 생각하며 자제했었지. 엄마가 겪은 바로는 놀러가기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강연 찬스'란다. 신기하게도 블로그를 통해 강연 신청이 왔고, 강연료에 교통비까지 지원해 주신다길래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기회를 물었지. 이번 서울행도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다녀왔단다.

 

몸은 고됐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일까, 다행히 울 축복이가 건강하다고 해서 엄마는 무척 기쁘단다. 심지어 머리와 배 크기가 주수보다 2주나 크대. 또, 초음파 통해서 울 축복이 얼굴도 봤지. 꼭 창문에 얼굴을 꾹 눌러댄 것 같았어. '아기공룡 둘리' 같은 얼굴이었지. 원래 초음파로 보면 아기들은 못생겼대. '입체 초음파'를 하면 좀 다르다던데, 엄마랑 아빠는 입체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건 필수 검사는 아니고, 그냥 아기 얼굴을 보는 게 목표라고 하더라. 이미 25주에 정밀 초음파 통해서 우리 축복이 건강한 걸 확인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싶어. 입체초음파를 하는 동안 밝은 빛 때문에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엄마 아빠는 그건 건너뛰기로 했단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지만 엄마 아빠 닮겠지, 누구 닮겠니? 그치?

 

가끔 네가 무척 보고 싶다. 아빠도 그렇대. 축복이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얼른 보고 싶다셔. 아무리 그래도 엄마 뱃속에서 충분히 있다가 약속한 그 날에 만나자. 알았지? 정말 사랑한다, 우리 딸.

 

처음에는 '건강만 하렴' 생각했다가 최근에는 '엄마, 아빠 예쁜 곳만 닮아 태어나렴' 하며 욕심을 갖게 돼. 하지만 말이야,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건 무조건 건강이야. 우리 축복이가 이 세상에 축복처럼 기적처럼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축복이가 어떻게 생겼든 우릴 닮을 내 딸, 우린 정말 너를 사랑하고 응원할 거야. 사랑한다. 끝까지 널 지켜줄게. 건강히 놀다가 만나자.

 

29주 3일된 딸에게

엄마가

 

아빠 친구들 가족과 함께 떠난, 1박 2일 청도 여행.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에서 찍은 아빠와 엄마, 축복이 사진.

 

 

<5> 딸에게 쓰는 편지

 

축복아, 여기는 부산추리문학관이야. 해운대 달맞이공원에 위치했단다. 김성종 작가님께서 꾸린 공간인데, 추리 관련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건물은 총 3층이고, 1층은 카페야.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면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2, 3층을 둘러볼 수 있단다.

 

엄마, 아빠는 오늘 이 곳만 둘러보고 집으로 갈 예정이야. 부산은 외갓댁이 있는 곳이고, 대학생 시절부터 '부산국제영화제'며 뭐며 자주 왔던 곳이라 많은 곳을 가봤어. 그래서 매우 익숙한 도시란다. 네 아빠와 여행도 서 너 번 왔지. 그래서 딱 이곳만 보고 집에 가기로 했어.

 

축복아, 어제 뱃속에서 엄마 강연 잘 들었니? 강연 시작 전,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 강연 장소는 '해운대 그랜드호텔'. 지자체 공무원들 250여명이 대상이라는데, 그동안 엄마가 섰던 무대 중 제일 큰 자리야. 그래서 대본을 직접 적었을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단다. 엄마를 불러주신 분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똑부러지게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여겼거든.

 

일부러 강의 한 시간 전에 해운대에 도착해서 카페에서 숨을 고르며 시간이 되길 기다렸지. 막상 호텔에 가보니 조명이 어두컴컴하고, 무대 위에 올라서야 하는 게 아니라서 편안하게 강의 했단다. 주제는 <스토리텔링으로 소통하라!>야. 그동안 엄마가 해왔던 강연 주제와 잘 맞아서 기존 자료를 보완해 준비했단다. 강연은 성공적으로 잘 마쳤어. 100점 만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마이너스는 아니었지.

 

이번 강연은 엄마가 다녔던 회사 L 팀장님이 주신 기회란다. 정말 올곧고, 따뜻한 분이셔. 엄마가 그곳에서 일하게 된 것도 팀장님이 엄마를 뽑아주셨기 때문이지. 사실, 면접을 본 후 엄마는 그 자리를 거절했단다. 내 인생에 처음 있던 일이었지. 엄마는 "뽑아주시면 감사히 일하겠습니다" 모두의 '열정' 빼면 시체인 사람인데, 이때는 상황이 좀 남달랐어. 좀 힘든 때였거든. 대구에 내려가서 직장을 두 번이나 바꾸고, 사람들에게 실망도 많이 하고, 이리저리 치이던 때였지. 그래서 다음 직장만큼은 신중해야겠다고 여긴 거야. 그래서 거절했는데, 서류를 넣었던 직장에서 계속 미끄러지자 좀 후회가 되더라고. 통장 잔고는 줄고, 직장을 다니긴 다녀야겠고. 막막했는데 이 곳에서 다시 전화가 온 거야. 당연히 "무조건 열심히 해보겠습니닷!" 마음 먹고 바로 출근했지.

 

그 후,  무슨 일이 벌어졌게? 엄마는 2년 동안 신바람 나게 일했단다. 엄마가 다녔던 회사 중, 가장 깔끔하고 가장 체계적인 곳이었어. 직원들도 어찌나 신사다운지, 그 중의 최고는 팀장님이셨지. 일개 계약직인 나를 굉장히 인간적으로 따스하게 대해주셨단다. 엄마에게 보여준 순수한 호의와 애정 덕분에 엄마는 2년 동안 즐겁게 일했고, 자존감도 많이 회복했어. 팀장님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더욱 잘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일한만큼 성과도 있었고, 존중 받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

 

엄마는 살면서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단다. 자칫,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허방 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가까스로 벗어나는 경험. 위험한 순간, 누군가가 기적처럼 손 내밀어준 경험. 엄마가 망쳐놓았던 일이 깔끔하게 매듭되는 경험. 이런 순간의 기적들이 지금의 엄마를 만든 거야. 엄마는 그 기적의 힘이 네 외할아버지가 도와주신 게 아닐까 생각했단다. 그 마음을 담아 첫 장편동화 <유령과 함께한 일주일>을 썼지. 종교가 생긴 후에는 하느님이 도와주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 신의 섭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겨를이 없거든.

 

엄마가 2년간 일한 직장, 그곳에서 만난 L팀장님 역시 엄마는 신이 보내준 선물이라고 여긴단다. 엄마는 분명 그때 정체 모를 두려움이 압도 당해 거절로서 그 자리를 놓쳤지. 그런데 기적처럼 다시 연락이 왔잖아. 물론, 더 좋은 기회가 기다렸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감일뿐, 엄마가 겪은 바로는 최고의 결과였다고 여겨. 늘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시는 신께 엄마는 참 감사하단다. 우리 부부가 필요한 순간, 너를 보내준 것도 신의 선물이지.

 

엄마는 이 세상이 각박하다고만 여겼어. 사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점점 줄이게 됐지. 엄마는 유독 상사 복이 없는 편이었거든. 다들 인간적으로 까칠한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모두들 일 하나는 잘했어. 그 덕분에 엄마는 일을 제대로 배웠단다. 돌이켜보면 모두 고마운 분들이야. 사람은 좋은데, 일 못하는 상사 밑에서 배웠다면? 글쎄, 이 경우는 행복은 짧고 고통을 오래 지속됐겠지. 다행히 엄마는 전자라서 고통을 짧고, 행복은 긴 케이스야. 일머리는 생겼으니까 말이야.

 

엄마는 사람에게 상처받아도 사람에게 치유받을 수 있다고 믿는단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엄마는 사람들과 용감히 부대끼고, 기꺼이 상처받는 편인데, 그 과정에서 괜히 벌이지 않아도 될 일을 저질러놓고 사서 고생하기도 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치유 받고 감동 받는단다. 엄마는 사람을 믿어.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정, 연대, 공감의 힘을 믿어. 우리 축복이도 상처 받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치유력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

 

세상은 각박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단다. 엄마는 사람이 희망이고 삶의 이유라고 생각해. 엄마가 받은 호의와 애정을 엄마 역시 남에게 베풀며 살고 싶어. 사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가장 불편하고 아픈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다. 엄마는 그래서 대부분 참는 쪽을 택하지만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곤 하지. 그건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중요한 건 미움의 마음을 갖지 않는 거야. 쉽지 않겠지만, 남을 쉽게 미워하지는 마. 마음이 힘들 때는 '기도'를 해보렴.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엄마 역시 강연을 앞두고 마음 속으로 열심히 기도했단다. 그 결과 무사히 강연을 마쳤어. 우리 축복이, 엄마가 오래 서 있는데도 힘들어하지 않고 씩씩하게 있어줘서 고마워. 이쁜 내딸, 엄마 뱃속에서 편안하게 있으렴.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단다.

 

어제 강연을 마치고, 주최측에서 내어주신 숙소에서 1박을 했어. 네 아빠도 회사를 마치고 넘어왔단다. 강연 기회 덕분에 오랜만에 아빠와 데이트를 했어. 해운대 바닷가도 거닐고,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말이야.

 

또, 오늘 기적처럼 기쁜 전화를 받았단다. W 출판사에서 괴담 동화집을 기획 중인데 제주도 아이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거야. 사실 엄마가 최근 W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장편동화를 응모했는데, 떨어졌거든. 헤헤. 그래서 실망하던 차였는데, 신기하게도 전화를 받았지 뭐야. 엄마 고향이 제주라서 가능한 기회였지. 하지만 그렇다고 제주도 출신 작가가 엄마 혼자만 있는 게 아닌데 정말 신기한 일 아니니? 엄마는 유명한 작가도 아닌 걸. 그렇기에 더더욱 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이야. 이것 역시 신의 섭리가 아닐까 싶어. 엄마는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한단다. 주님이 엄마에게 능력 밖의 일을 주시며 단련시켜 주신다고 말이야. (불과 3년 전, 무교였을 때만 해도 엄마는 이런 종교인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런데 엄마가 겪어보니 이것 말로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어.)

 

축복아, 네가 참 복덩이야. 많은 여성들이 임신, 출산, 육아로 경력단절을 겪는단다. 그래서 임신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지. 엄마도 많이 두려웠어. 하지만 주님이 주신 축복의 씨앗, 너를 잉태하고 정말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했어. 마음 속으로 출산 시까지 많은 작품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쉽지 않더구나. 그래서 우울하기도 했지만, 또 반면에 새로운 기회와 도전이 많아 신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야.

 

엄마는 축복이 너와 함께 좋은 글을 많이 많이 써나갈 거야. 엄마의 개인적인 게으름, 혹은 고난과 어려움을 네 탓이라 여기지 않을게. 넌 나에게 축복이니까. 엄마, 아빠에게 와줘서 고마워. 그 많은 부모들 중, 우리를 택해줘서 고맙단다. 축복이 네가 태어날 때까지 엄마 열심히 끌 쓰고, 맡은 일들 즐겁게 해나갈게. 아무 걱정 말고 재밌고 편안하게 지내렴. 무럭무럭 자라라.

 

23주 2일

엄마가

 

[사진 이모저모]

전경이 끝내줬던 숙소.

셀카가 빠지면 섭하지.

호텔 로비에서 아빠.

 

팀장님 추천으로 방문한 <백미당>

아이스크림 라떼 맛에 푹 빠져버렸지.

 

부산에 온 김에 중고사이트를 통해 봐뒀던 노트북을 저렴하게 구매했단다.

 

추리문학관에서 노트북을 테스트하다가 찰칵. 둘이 닮았지?

 

이런 걸 '설정샷'이라고 한단다.

 

책이 정말 많았어. 꼭, 초등학교 시절 '여름독서교실'로 방문했던 고향 동네 작은 도서관이 생각나더구나.

문도 엣지있게 셜록.

축복이의 존재감 뿜뿜.

 

 

 

 

 

우리 부부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가 먼저 준비한 것은 작은 노트였습니다.

여기에다 편지를 적어둘 생각이었지요.

 

제목은 <우주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

'우주'는 제 아이에게 붙이고 싶은 이름이에요.

20대부터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우주'라는 이름을 주고 말겠노라 다짐했지요.

 

왜 하필 우주냐고요?

제가 '과학지식이 풍부해서'는.. 물론, 아닙니다.

우주 세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이 있기도 했고,

끝없이 펼쳐진 우주가 주는 막연함, 경이로움이 좋았습니다.

어감도 좋았고요.

 

고백하자면, 남자친구가 생길 적마다

그의 성에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보곤 했습니다.

"내 아이 이름은 무조건 우주야!" 이렇게 큰소리 치기도 했습니다.

(결혼하자는 말도 없었는데요.)

 

그러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요.

남편은 '하'씨 입니다.

고로, 우주는 '하우주'가 되겠지요.

저는 이 이름이 좋은데, 주변의 반응은 반반입니다.

사실, 별로라는 의견이 조금 더 많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우주야!'라고 고수했던 저는

점점 마음이 약해집니다.

좋은 이름이 있다면 붙여주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많은 이름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지만

결국에는 '하우주'가 제일 나은 듯 합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아무튼, 편지를 써내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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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적으려고 노트를 펼쳤지만

'편지 쓰기'는 게으름 탓에 드믄드믄 이어지다

결국 '한 달의 한 번' 이벤트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SNS를 많이 이용했지만,

SNS는 간편한 대신, 가볍고 휘발되어 버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면, 노트는 믿음직스럽고 듬직합니다.

또,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술술 나옵니다.

단점이 있다면, 휴대가 쉽지 않고(자주 까먹어요)

글씨 쓰는 게 무진장 귀찮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손편지의 여왕이었는데

이제는 글을 썼다하면 손이 아프더라고요.

 

노트와 SNS 사이에서 항상 고민하며

미련하게 두 가지를 다 이어갑니다.

아가가 태어난 후 '육아일기'는 어떤 방식으로 쓸지

지금도 고민 중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쓸 데 없는 고민을 한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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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 공간에는

노트에 쓴 편지를 블로그에다 옮겨 적으려고 합니다.

'누가 내 글을 보기는 볼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기록해보렵니다.

노트에 세밀하고 은밀한 이야기도 많아서

그런 부분까지 옮길지 어떠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마음가는대로 일단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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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에게 쓰는 편지, 시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