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2015년 10월 3일, 개굴양은 너굴군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위해 개굴양은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으니

바로 <셀프 청첩장> 만들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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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따위는 배워본 적 없고

그저 손가락으로 끼적이는 그림이 전부인 나.

도대체 무슨 용기가 생겨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일까?

 

당시의 나를 연결해 본다.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식이잖아요. 특별하고 싶었어요."

뭐, 이렇게 대답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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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결혼은 임박했는데

청첩장은 제때 만들지 않아

한없이 미뤄뒀던 나.

 

정말 이젠 더 이상 미뤄두면 안 될 것 같아

거의 결혼식 한달 전엔가 후닥닥 만들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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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과정은 별 거 없지만

예~전에 포스팅했던 것을 참고하면 될 듯 하다.

 

<셀프청첩장 만들기 프로젝트>

http://writerkim.com/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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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탄생한 셀프 청첩장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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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썩 멋있진 않지만

'생 초보'가 만든 녀석이라는 걸

감안해 주세요! 호오옹!

 

 

 

 

그림 그리기와 채색은 물론,

캘리그라피와 약도, 편집까지 직접 했다.

업체에 보내서 프린팅만 했다.

 

신랑은 못생기게 그리고

나만 예쁘게 그려서.... 암쏘쏘리!

 

 

 

다시 보니 새로새록하구마이!

 

 

 

2015년 10월 3일 개천절, 너굴군과 결혼했다.

 

이 블로그에는 '셀프 청첩장' 만드는 과정까지 올렸다가 말았더랬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신혼여행도 다녀온 우리는

현재 2년차 '신혼' 부부다.

그리고 뱃속에는 19주 된 딸내미도 있으니..흐흠.

 

그간의 게으름을 뒤로하고,

날짜야 어찌되었건 우리 부부의 '꿀잼 라이프'를 기록해보려 한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셀프웨딩 촬영>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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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15년, 스몰웨딩이 한창 유행이었다.

예식장과 패키지는 너무 비싼 것 같아서

'야외 결혼식'을 계획했다.

 

마침, 영천 시안미술관과 인연이 있었기에

그 곳에서 하면 좋겠다, 어렴풋 생각했다.

 

그러나 '야외 결혼식'의 실체를 알게 된 우리는

서둘러 그냥 동네 예식장을 예약했다.

 

스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스몰이 아니었다.

스몰을 과장한 L사이즈였다고!(이런 제일 나빠!)

 

일단, 야외 결혼식을 하려면 바깥에 이런저런 설치를 해야했고,

뷔페를 따로 불러야했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동네 예식장에서 가장 평균적인 코스를 예약했고

거기에다 우리는 스튜디오 촬영을 제외하고

드레스, 턱시도 선택과 당일 메이크업, 결혼식의 전반적인 것을

세트로 묶어 진행키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자 많은 게 한결 수월해졌다.

무엇보다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아아, 어른들에게 밥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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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남은 과제는 '웨딩 촬영'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면 가장 간단했겠지만

어쩐지 과한 조명을 받아가며 촬영하기 싫었다.

 

더군다나 세월은 모든 기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조작한다고,

포토샵으로 작업한 앨범 속 내 모습을 보며 먼 훗날

"아아,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연예인 뺨치는 외모였다고!"

라며 착각하긴 싫었다.

 

그래서 우리는 '셀프 웨딩'을 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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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사진작가님을 한 명 알고 있었고,

이 분의 도움으로 영천 시안미술관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역시 전혀 '스몰'하거나 간단하지 않았으니...

 

우선, 드레스 선택이 관건이었다.

 

인터넷으로 드레스를 덜컥 구매한 나는

드레스에 맞춰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웨딩 촬영 이후, 드레스는 옷장에 쳐박혀 있다.)

 

드레스를 샀으니 웨딩 슈즈가 필요하고, 악세서리가 필요하다.

신랑은 턱시도를 입어야하고, 코사지도 하나 해야한다.

이렇게 저렇게 준비하다보니 돈은 줄줄이 나갔고,

스튜디오 촬영만큼 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별 차이가 없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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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당일, 나는 근처 샵에 가서 머리를 하고 메이크업을 했다.

화장하면 예뻐질 줄 알았으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녕 포토샵이 답인가!

 

옛 어른들은 참 현명하기도 하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는 말은

누가 지었는지 참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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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영천에는 비가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날은 아주 좋았고,

더위 마저 물러가 촬영하기 딱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찍은 우리의 웨딩 사진을 공개한다!

(포토샵은 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했는데도 이 얼굴이면 그냥 콱... 물에 코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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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재단 기관지인 <4.3과 평화>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학보사 선배님의 청탁을 받아 쓴 '탐방기'입니다.

(S선배, 감사해요! *.* )

 

제목은 <아이야, 기억하자꾸나. 제주4.3의 아픔을...> 입니다.

 

2015년 7월호니,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이렇게 틈틈이 쓴 글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제야 올리려니 다 올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원고 전문>

아이야, 기억하자꾸나. 제주4.3의 아픔을...

동화작가 김정미

 

해마다 제주가 낯설었다. 고향 제주를 떠나 뭍으로 나간 지 7년. 강산이 바뀌기에는 아직 모자란 시간이지만, 제주에 올 적마다 ‘휙휙’ 변해가는 모습에 적응이 안 됐더랬다. 그런 제주를 어떻게 마주봐야할지, ‘육지’에서 제주와 어떻게 연을 이어가야할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에 발 딛을 때마다 관광객인 척 시치미 뗐다가 서둘러 비행기에 몸을 싣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한동안 멀어졌던 4‧3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7월 3일 금요일. 여름의 길목에 선 제주는 몹시 싱그럽고 눈부셨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 근무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운 좋게 제주4‧3평화기념관과 공원을 둘러보게 됐다.

 

기념관에 들어가기 전, 잔디밭에 덩그러니 놓인 벽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독일 통일의 상징물 ‘베를린 장벽’이었다. 2007년 제주도가 독일 베를린시와 친선을 맺으며 돌하르방과 교환한 것이라고 한다. 베를린시 어딘가에 위풍당당 서 있을 돌하르방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념관에 발 딛자마자 영상실부터 찾았다. 4‧3사건 유족인 한 청년이 제주 4‧3의 역사와 진상규명의 노력, 제주4‧3평화공원 건립 등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4‧3사건을 바로 알게 되면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청년의 얼굴 위로 내 대학시절이 겹쳐졌다.

 

‘4‧3’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치기 어린 학생기자 시절이 떠오른다. 제주대학교 03학번이었던 나는 학보사 수습기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4‧3기행을 떠났다. 워낙 볕 좋은 날이라 봄 소풍 가듯 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그런데 발 딛는 곳곳마다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빨갱이’ ‘폭도’ ‘좌익’ ‘우익’ 이라는 단어가 뒤엉켜 둥둥 떠다녔다. 대체 빨갱이가, 좌익과 우익이 무엇이기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걸까?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무슨 죄이기에 가족을, 마을을 모두 말살시킨 걸까. 북촌 너분숭이를 둘러보고, 허리를 굽혀 다랑쉬굴에 들어가면서도 궁금증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인터넷으로 허겁지겁 ‘이데올로기’의 뜻을 찾아봤다. 그런데도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과연 죽음의 당위가 되는지를 말이다.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이유 없이 죽음만을 위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무자비한 강압과 폭력 앞에 사람은 벼룩만큼이나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천둥벌거숭이 같던 대학 시절의 기억을 뒤로하고, 4‧3 전시관으로 향했다. 총 6개의 전시관과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돼 있었다. 규모가 꽤 커서 놀랐고, 애니메이션과 영상 자료 등 세대별로 눈높이를 맞춘 프로그램 구성에 두 번 놀랐다. 또 흔들리는 섬, 바람 타는 섬, 불타는 섬, 흐르는 섬 등 4‧3의 정체성을 담아낸 전시관 이름에 세 번 놀랐다.

 

4‧3사건의 주 피신처였던 동굴의 모습을 재현한 ‘역사의 동굴’을 지나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4‧3 백비’가 나를 맞이했다. 봉기‧항쟁‧폭도‧사태‧사건 등 다양하게 불리어왔지만 ‘진짜 이름’을 찾지 못한 제주4‧3에게 나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전시관을 통해 제주4‧3이 어떻게 발화되었는지, 학살의 이유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토벌대의 학살과 무장대의 공격으로 어떻게 제주도가 어떻게 죽음의 섬이 되어갔는지를 살필 수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제주4‧3을 통해 도민의 1/9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희생자 다수가 노인과 여성, 어린이 등의 약자였다. 또, ‘곤을동’ ‘오우눌’ ‘리생이’ ‘드르구릉’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의 마을 84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제주 4‧3의 가장 큰 아픔은 공동체의 붕괴에 있을 것이다. 가족처럼 서로 돕고 믿고 의지하던 이웃이 한 순간에 ‘적’이자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낯선 침묵의 시간을 유족들은 어떻게 견디었을까.

 

‘다랑쉬 굴’을 재현한 특별전시관도 매우 인상 깊었다. 1992년 발굴 당시의 유골, 옷가지와 그릇 등의 물품을 그대로 재현했다. 등 한 번 펴기도 힘든 낮은 동굴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행여 토벌대에게 걸릴까봐 빽빽 울어대는 아이의 입을 막는 바람에 여러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내 안에 돌고 돌아 글이 되었으리라.

 

전시관에는 4‧3 유족들의 증언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TV를 가득 채운 주름진 얼굴을 보자 기억 저편에 있던 민국이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민국이는 나와 같은 마을에 살던 4살 어린 남자아이였다. 민국이 할머니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는데, 어쩌다 다친 것인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무덤까지 들고 가야할 비밀인 것처럼 어린아이의 보챔에도 어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이 된 나는 ‘4‧3 아카이브전’ 전시영상 속에서 민국이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4‧3 유족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담아뒀던 것들을 숨 가쁘게 토해내는 할머니 모습에 그제야 4‧3이 피부에 와닿았다. 4‧3이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찌나 부끄럽고 아프던지.

 

전시관을 둘러본 후, TV에서만 보던 4‧3공원으로 향했다. 경건하게 솟은 4‧3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귀천’이라 이름 붙여진 조형물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치형의 위령제단을 통과해 위패봉안소로 들어갔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1만5천여 개의 위패가 마을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차마 이름도 확인되지 않아 ‘누구누구 댁’ ‘누구누구의 자(子), 녀(女)’라고 적힌 위패들이 많았다.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시신이 여기에 놓였다면,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이름들은 야외 ‘행방불명인 표석’에 새겨졌다. 봉안소를 나와 저 멀리 까맣게 솟은 표석들을 보는데 그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육(肉)을 찾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들이 줄줄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졌다.

 

제주 4‧3사건이 발발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4‧3사건 유족들이 저마다의 동굴에서 나와 아픔을 알린 지도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4‧3 유족들에게 고개 숙이며 공식사과를 했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요 몇 년 간 움트던 희망이 짓밟힌 것 같아 상심했다. 그러나 4‧3평화기념관과 공원을 둘러보며 안심했다. 역사를 기록하고 증명하는 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또렷이 전해질 것이기에.

 

4‧3평화기념관 ‘생명평화의 벽’에 붙어 있던 쪽지 하나가 떠오른다.

“무서웠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갓 한글을 배웠음직한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에 가슴이 뜨끔해졌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진짜라고 우기고 싶어질 때마다, 표독스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동화를 쓸 때마다 기억해야겠다, 아이의 쪽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