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목소리 더빙)


[영화 리뷰]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비록 예매전쟁에 밀려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위시 리스트'에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도 올라 있었다. 

영화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꼭 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위안했다. 다행히 영화는 영화진흥기구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무비꼴라주상까지 3관왕을 차지하며 소수의 영화관에 개봉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친구들은 다들 이렇게 물어왔다. "영화 괜찮아? 잔인하다며?" 그들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편하고 잔인해. 하지만 피 터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그런 잔인함은 아니야. 보고 나면 알게 될거야. 우리가 꼭 알아야할 잔인함이라는 걸"이라고 말했던가.

왜 이 영화를 <잔혹스릴러>라고 명명했는지 알아채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로 첫 장면부터 잔혹(?)하고 불편하니 말이다.

여기에서 잠깐,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줄거리를 살펴보자.

[영화의 줄거리]

세상이 버렸던 15년 전 그날, 그 끔찍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회사 부도 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살인한 ‘경민(목소리 오정세)’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고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석(목소리 양익준)’을 찾아 나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먹고 사는 종석은 15년 만에 찾아온 경민의 방문에 당황한다. 경민은 무시당하고 짓밟혀 지우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과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철이(목소리 김혜나)' 이야기를 종석에게 꺼낸다. 그리고 경민은 학창시절의 교정으로 종석을 이끌어, 15년 전 그날의 충격적인 진실을 밝히려 하는데...


강자가 되기위해 괴물이 되기로 한 '돼지들의 왕' 철이

영화는 회사 부도를 맞은 경민이 중학교 동창이던 종석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된다. 삼겹살과 소주를 앞에 두고 15년 만에 어색하게 마주한 중학교 동창인 이들은 중학교 시절을 추억(?)한다. 

종석은 소설가를 꿈꾸는 대필작가로, 경민은 어엿한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의 모습으로 술잔을 부딪힌다. 홍상수 영화 <하하하>에서 두 남자가 술한잔 기울이며 지난 여름을 회상하듯, 경민과 종석은 중학생 시절을 이야히 하고 그때마다 장면은 '플래시백'된다.

경민은 중학교 시절 '울보'였다. 키가 작았고 몸이 허약했으며 자주 눈물을 보였다. 종석은 경민 처럼 눈물을 보이는 사내는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키가 작고 힘이 약했다. 경민과 종석은 자주 힘이 센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학생선도부였으며,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힘까지 쎘다. 이들이 구타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 반 친구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슬금 슬금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 앞에 '철이'가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철이는 반에서 존재감이 없는 아이 중 한명이었다. 얼굴은 어두웠고 자주 결석했으며 공부에는 흥미조차 없는 녀석이었다. 철이의 주먹은 매서웠다. 경민의 노트를 갈기갈기 찢은 녀석들에게 시원스레 주먹을 먹이는 철이를 종석과 경민은 경외스런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철이가 우리 모두를 구원해줄 거야"라고 말이다.

"돼지들은 늘 자신의 살을 찌우지만, 그 살은 돼지들 자신의 몫이 아니야. 다 개들에게 먹힐 살들이지. 우리는 돼지들이야"

"나는 그들이 지금 이 시절을 떠올리면서 '아 이런 때도 있었지'라며 추억하지 않길 바래.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로 만들어 줄거야"

"강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해. 강해지려면 악해지는 수밖에 없어"
※ 대사는 정확하지 않으니 양해 바랍니다

철이는 강해지려면 악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스스로 강자가 되기 위해 괴물이 되길 자처한다. 과연 철이는 강자가 될 수 있을까.




어리다고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중학교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축소판 같다. 어리다고 순진무구하고 선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권력'을 알고 복종할 줄 안다. 복종하는 자 위엔 군림하는 자가 있다.

아이들의 '힘'은 부모의 재력, 성적, 네트워크에서부터 기인한다. 철이처럼 가정 환경은 불우하지만 주먹이 쎈 친구가 공부 잘하는 이른바 '범생이' 친구들을 휘어잡는 세상은 지났다. 요새는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 학원 다니며 공부도 잘 하고, 잘 먹어서 체력도 좋지 않던가. 있는 자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는 결핍된 아이들을 장악한다. 이렇게 '작은 권력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권력은 제법 견고하고 탄탄하기 때문에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변화하고 바뀔 것이라 희망을 품었던 종민과 경민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된다. 그들이 희망을 걸었던 돼지들의 왕 철이는 과연 그 과제를 해결해, 영웅이 되었을까?  대답은 노코멘트. 어떤 의미에서 철이는 영웅이고, 어쩌면 실패자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직접 접하길 바란다. 치명적인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아직 안 봤다면 꼭 보시라. 특히 기성세대들이라면.

앞에서 말했듯이, 영화는 잔인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덜 잔인하다. 피 튀기며 상처를 주고 입히는 잔인함은 아니지만 메세지 적인 측면에서 이미 충분히 잔인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점차 자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충격이고 고통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처럼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가 되길 포기한 채 돼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각하게끔 만든다. 모든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고통스럽고 경악스럽다. 스스로 찌우고 있던 이 살이, 나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임을 깨닫고 무기력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자각으로 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자신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잘 알게 된 후에는 삶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발 내딛고 있는 삶이 어제도 오늘도 '여기'에 있지만, 깨달은 후의 내일은 '이전과는 다른 여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장르 개척

장르나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이 영화의 탄생은 의미 있다. <돼지의 왕>이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라고 한다. 올해 5월 편집본 작업을 끝냈으니 1년이 채 걸리지 않아 작품을 만든 것이다. 예산은 1억 5천만원.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작품은 제작됐다.

감독은 군대에 있을 때 이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시놉시스를 완성했다고 한다. 원제는 <1991년 우리들의 영웅, 철이>였다. 본인이 90년대 중학생이었던 까닭도 있고 목적의식이 분명했던 80년대를 지나 또 다른 싸움으로 정처없이 표류하던 상실의 시대 90년대를 다루고 싶었단다.

애니메이션의 원안은 만화가 최규석이 작업했다. 최규석은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대한민국 원주민> <습지생태 보고서> <울기엔 애매한> <100도씨>와 같은 만화 작품들을 그려왔다. 그의 작품에는 삶에 대한 반성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이, 약자들이 늘 주인공이었다. 심각하게 무게잡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최규석 만화가가 이 작품에 참여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을 만들기 전에 이미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최규석 만화가와 함께 손을 잡은 경험이 있다. 이 외에도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겸 배우), 김꽃비 등이 목소리 더빙을 하며 제작에 참여했다.

스토리 역시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 했던 것을 한단계 뛰어 넘었다. 보통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오세암> <마당을 나온 암탉> 등, 대부분 아이들의 동심을 얘기하고 성장 과정을 그린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돼지의 왕>은 불편할 정도로 사회의 적나라한 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동심만 있는 게 아닌, 다양한 욕망과 욕구를 지니고 있는 '개인'들이다. 약한 것을 보면 짓밟고 싶고, 많이 갖고 싶고, 늘 돋보이고 싶고, 힘을 과시하고 싶은 하나의 동물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영악함에 절로 고개를 흔들게 된다. 이 학창시절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학창시절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손을 들고 감독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라고.

그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분노하는 건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화가 나거나 부당하다 생각할 때 분노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 했던가.

희망담론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 안에 숨은 고통, 분노, 상처, 비명 등은 무시되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니까. 그렇지만 분노나 화는 자연스런 감정의 반응 중 하나다. 그렇기에 화날 땐 화를 내고, 요구할 땐 요구하고 비명을 지를 땐 과감히 '꽥' 질러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표현은 거대 자본이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에게 먹히기 않고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몸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슬프고 허무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시원했다. 아무리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봐도 이 도시는 '아스팔트 보다 더 차가우니까'. 그걸 인정하게 됐고, 그 안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연상호 감독, 차기작은 <사이비>

<돼지의 왕>을 보고 나서 연상호 감독의 팬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 읽게 되었고,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얻을 수 있었다. 아래 내용은 시네21에서 발췌한 것. 다음 작품은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라고 한다.

 
-차기작 <사이비>는 어떤 이야기인가.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다. 곧 수몰될 마을이 배경인데 그 마을에 사이비 교회가 들어오면서 진실을 말하는 악한과 거짓을 말하는 선인이 대립한다는 이야기다. <돼지의 왕> 제작이 미뤄지면서 썼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작업 중이다. 최악의 엔딩을 준비 중이니 기대해도 좋다. (웃음)

<돼지의 왕>으로 나태하게 하루하루 삶을 연명했던, 혹은 개들이라 착각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돼지들을 화들짝 놀라게 만든 연상호 감독.
그의 차기작 소식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끝>





 
똥파리
양익준 감독/ 양익준, 김꽃비, 이환 등

 영화 <똥파리>가 개봉했던 2008년, 삼청동 선재아트센터에서 영화를 봤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극장의 분위기며, 나를 둘러쌓던 공기며,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강렬한 영화는 줄거리 뿐만이 아닌 그 순간을 모두 기억케 하는 힘이 있다. 당시에 영화를 보고 다소 흥분하며 썼던 영화평을 여기 싣는다. 손을 봐야겠지만 손 볼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흑.


'가족'은 얼마나 폭력적인 존잰가. 살아가는 데 힘을 주고 의지가 되는 소중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존재가 힘을 잃고 일그러져버릴 때, 한 핏줄을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은 얼마나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가.

무기력한 가족, 힘이 없는 가족, 삶을 황폐하게 내 던져버린 가족, 그런 가족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인가. 같은 피를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임을 행사하고 그 권한을 이용해 모든 고통을 감수하라는 건 정말 폭력적이다. 

 

영화 <똥파리>에서도 그런 가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보여준다. 극중 상훈(양익준 분)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안의 '가장'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 힘을 가진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이유로 부인을 때리고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폭력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들이 한 핏줄로 구성된 '가족'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상훈이 사채를 빌린 이들에게 돈을 수거하러 갈 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한 가장은 또 다른 이에게 두드려 맞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부인에게는 신이자,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 그래야만 할까. '가족'이니까. 살을 한 데 비비고 살아야만 하는.

  이런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 역시 어른이 되어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징글징글한 가족을 떼어버리고 싶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가족 구성원의 삶에 짐을 져버리기도 하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죄책감' 혹은 '미안함' 혹은 '구질구질한 감정'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상훈 역시 핏줄이라는 것에 엄청나게 대항한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이새끼 저새끼" 쌍욕을 던지고, 너무나도 거칠게 대한다. 가족이라는 것에 굉장히 쿨해지려 노력하고 '내 피를 쏟아 저 새끼에게 부어버리고 싶'을 만큼 핏줄이라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런데 결국 그는 어떠했나. 자살시도한 아버지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냅따 달리지 않았나. 결국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가족을 위해 흘리지 않았나. 던져버리고만 싶었던 가족의 끈을 다시 움켜잡고 '새 삶'을 꿈꾸지 않았나.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도도리표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는 존재,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전형적인,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 가족의 폭력성과 또 그 반대에 존재하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절로 났는데 그 이유는, 나 역시 끊임없이 가족을 거부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는 상훈을 닮아서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리얼하다. 도대체 왜 우리네 가족들은 그렇게 아파하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야만 할까. 이 무시무시한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 덧붙이는 말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3년이 지나면서 가족에 대한 사고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시리 가슴이 아프고 울컥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나 핏줄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의무감 등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걸 여러차례 깨닫고 나서 더이상 '가족'이라는 존재를 민감하게 받아드리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후에 나는 되레 열심히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나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가족으로서의 의무라고 믿게 됐다. 가족이기에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족이기에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독립하여 잘 살아가야 한다. 어차피 핏줄이든 뭐든, 인생은 자신의 몫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