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진실을 향한 기록, <다이빙 벨>

'우리도 어쩌면, 언젠가는'

 

 

다큐멘터리/ 감독: 안해룡, 이상호

 

<다이빙 벨>을 봤다. 2014년 11월 12일, 오후 4시 10분 영화를 봤다.

 

외근을 나갔다가 일찍 끝나서 바로 동성아트홀로 갔다. 대구에 온 지 7개월.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극장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곳, 아마 대구에서는 거의(?) 유일한 곳이 아닐까. 지역에 이렇게 독립영화관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한 달 전에 이 곳에서 연상호 감독의<사이비>와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연달아 두 편 봤다. 이때도 평일이었는데,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고무적이었다고나 할까.

 

말이 길었다. <다이빙 벨>을 보는 동안 몹시 불편했다. 어이가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 부채감이 나를 짓눌렀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이제는 잊자, 하였건만 사실 잊기 위해서는 넋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도 잘 알지 않는가. 집안에 누군가 돌아가시면 시신을 잘 닦아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르고 기도를 하며 보내준다는 것을. 그게 원칙이다. 그래야만 산 자도, 망자도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올해 4월, 나는 기적을 바랐었다. 여객선인 세월호에 이상이 생겨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회사에서 일을 하다 <전원 구조>라던 언론의 보도를 믿었다. 그리고 곧바로 배신. 실은 단 한명도 구조되지 않았다 했다. 이어 몇 명이 구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구조는 없었다. 시신만 건져 올릴 뿐. 찾지 못해 실종된 시신도 여럿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뭔가 이상하고 찝찝했다. 그러나 그 기분이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언론' 밖에 없었으니까. 수십가지 언론사가 입을 맞춰 "정부 차원에서 구조 작업이 한창"이라고 말했다. 수색 과정에서 잠수사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고, 해류가 너무 세서 구조를 중단해야 함에도 열심히 바다에 뛰어들고 있다 했다. 그리고 그걸 믿었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거다. 믿는 수밖에 없지 않나.

 

 

 

 

밤낮으로 언론보도에 귀 기울였다. 일을 하면서도 인터넷 속보 창을 띄어놓고 십 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했다. 기적을 바랐다.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구조작업은 더뎠다. 언론에서 그게 참 힘든 일이라고 하길래 '그렇구나' 했다. 그럼에도 이상했다. 아니 도대체 어째서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하는 걸까? 배 안에는 왜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그게 그리 힘든 걸까?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세월호 수색 작업이 더딘 틈에, 갖가지 '카더라' 통신이 흘러 나왔다. 홍가혜라는 여자가 언론에 인터뷰를 하면서 "자기는 민간잠수부인데, 정부에서 잠수부를 투입하지 않고 있다. 민간잠수부의 협조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영상이 SNS를 타고 떠돌았다. 하지만 곧, 그 여자의 '정체'가 밝혀졌다. 허연증이 심한 '이상한' 여자라는 것. 나도 개인 SNS에 이 여자의 주장을 실었다가 삭제했다. 그 아래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 여자 또라이래' '이 여자 정신 나갔대.'

 

그러다 또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나와 울부짖는 영상이었다. 나라에서 수색을 대충 한다고, 여기 현장에서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다고,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고. 그 영상을 보고 정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 쏟는 절규를 쏟아내는 동영상을 가짜로 만들기는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의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만들어낸 영상일 수도 있다고 아니면 가족을 매수했다고 하지 않겠나? 억측이 아니다. 그렇게 국민들은 진위를 모른 싸움에 휘말려 세월호가 침몰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행동이라는 괴담이 떠돌고, 유병언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보도 되고, 그런 보도들 속에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모든 게 정치적으로 얽히고 섥힐 뿐. 진물나게 싫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실망한 것은. 많이 피로했을 것이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희망,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보였다면 국민들은 이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걸 깨닫고 힘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는 우리에게 희망의 반대를 보여줬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결국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나 역시도 잊은 듯 했다. 생각나면 마음이 아프고, 괜히 손가락질 받는 것 같은 그런 부채감에 시달렸다. 당장 급한 일들을 하고 살아가면서 세월호 사건에는 귀를 닫았다. 그러던 중, <다이빙 벨>을 보게 됐고,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꼈다.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 이제라도 봐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언론과 정부에 대한 분노.. 등등.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다이빙 벨>은 철저히 누군가를 위해 편집된 영상이라고. 영상은 애초 촬영 때부터 편집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변치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부가 세월호를 수색하는데 안일했고 게을렀고, 심지어 왠일인지 하지 않았고 '다이빙벨' 투입을 방해했다는 것. 그것만로도 정부는 국민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팩트를 취재하지도 않고 소설쓰듯, 창작해 기사를 작성한 언론들. 과연 이들이 저널리스트인지 의문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이빙 벨'이 최선이고, 세월호를 짜잔! 하고 들어올릴 슈퍼맨 망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잠수사들의 피로를 줄이고 작업시간을 늘릴 수 있는 '좋은 도구' 임에는 틀림 없다고.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기록한다. 세 명의 잠수사가 다이빙 벨과 함께 작업했을 때의 시간과 컨디션을. 투입해서 잠수사들의 능률을 올렸다면, 적어도 세월호 선체 안에 진입은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또 하나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 개인을 국가가 왕따시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파잠수사 대표 이종인 씨와 이상호 기자가 바로 그러하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주 약간 기록되긴 했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 같은 것을 여러번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보며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책도 생각났고, 그 옛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빨갱이라 감옥에 쳐넣었던 살아있는 일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백산맥>을 집필하는 동안 무수한 협박을 당했던 조정래 작가도 생각났다.

 

개인의 호의와 정의가 어떻게 둔갑 되는가. 거기에 있어 언론은 얼마나 힘이 세고, 그래서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했다면 오버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도, 너도, 우리도 언젠가는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정의를 향한 목소리만으로 '반정부주의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정말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알 권리를 대신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집단인데 정부의 들러리 역할을 한 지 오래고,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의를 져버린다. 알쏭달쏭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사건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남의 집 불난 구경하듯, 바라봤다가 큰 코 다치게 될 지 모른다.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폭력들이 무한반복되고 있는 세상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단,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이빙 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 다이빙벨(diving bell) 이란? (백과사전 펌)


잠수부를 바닷속으로 이동시키고, 물속에서 오래 머물며 수중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비. 종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잠수종'이라고도 한다. 개방식 또는 습식(wet bell)과 폐쇄식(closed bell)으로 나뉘는데, 개방식 또는 습식은 윗부분에만 반구형의 둥근 지붕이 있고 하부는 개방된 형태로, 잠수부의 하반신은 물에 잠긴다. 폐쇄식은 밀폐되어 외부와 차단된다. 어느 것이나 수면 위의 바지선에서 기중기에 매달아 일종의 수중 엘리베이터처럼 바닷속으로 내렸다 올렸다 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며, 바지선과 연결된 관을 통하여 공기압축기로 다이빙벨 내부에 산소를 공급한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잠수부들이 직접 수면에서 수중의 목적 지점을 잠수하여 오가면서 소모될 체력과 산소를 비축할 수 있으며, 이곳을 일종의 베이스캠프로 활용하여 잠수부들이 휴식을 취하고 감압(減壓) 장비를 거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수면 위의 바지선에서 잠수부에 부착된 CCTV를 통하여 수중 활동을 모니터링할 수 있고 잠수부와 통신할 수도 있어 해저 작업에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맛’은 사라지고 ‘쇼’만 남았다.

TV 맛집의 허위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트루맛쇼’


 곧, 말복이다. 무더운 여름을 제대로 이겨내려면 몸보신 할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그래, 삼계탕이 좋겠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맛있기로 소문난 집을 찾아가서 먹어야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삼계탕 맛있는 집’이라는 글자를 입력한 후, ‘검색’ 버튼을 누른다. 수십만 개의 상호명이 화면 위로 쏟아져 내린다. 파워블로거들이 포스팅한 글을 읽어보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때 마침, 우연히 켠 TV에서 복날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뭣이라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삼계탕 집? 사람들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먹음직스럽게 먹고 있다.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맛있다고들 난리다. 방송국 게시판에 맛집 정보를 메모한 후, 시간을 내어 찾아간다. 그.런.데!!! 맛이 없다. 속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일이다. ‘TV에 출연한 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찾아갔는데 기대 이하의 맛 때문에 실망하고 돌아온 경험, 의외로 많이들 겪는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내 입맛이 대중적이지 못한 것일까?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다큐멘터리 <트루맛쇼> 제작진은 “TV 속 모든 맛집은 허구”라며 “그동안 당신들은 바보처럼 속은 것”이라고 일갈한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TV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맛집은 훌륭한 요리사와 레시피 대신, 돈과 데코레이션으로 포장된 ‘가짜 맛집’이다.


  “나는 TV 속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지 알고 있다”

  <트루맛쇼>의 오프닝 멘트다. 맛집이 맛이 없다니? 언뜻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멘트는 다큐멘터리를 이끌어 가는 주제이자, TV 맛집 프로그램의 실상이다.

  제작진은 TV 속 맛집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맛>이라는 상호명의 가게를 오픈한다. 경험이 전무한 주방장과 초짜 사장을 데려다 놓고 이렇다 내세울 메뉴도 없이 ‘TV에 출연한 맛집’이 되기 위해 한바탕 쇼를 기획한다.

  쇼를 달성하기 위해 제작진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유명한 메뉴? 레시피?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돈만 있으면 된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의 맛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방송협찬대행사나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대행비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3천여만원에 달했다. 이마저도 ‘스타의 맛집’과 같은 대중스타를 동반하는 프로그램은 가격이 배로 뛴다.

  돈을 지불하고 나면 그제서야 식당 최고 메뉴가 개발된다. 이슈와 영상이 될 법한 ‘방송용 메뉴’가 개발되고, 작가는 방송용 대본을 준비한다. 촬영 당일, 식당을 메울 손님들은 인터넷 친목사이트 회원들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가짜손님들은 “와∼맛이 끝내줘요” “잊을 수 없는 맛이에요” “올 여름, 이 음식 때문에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의 진부한 말들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

  맛없는 호박 요리를 내놓으며 PD는 “호박이 전혀 달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달다고 해주셔야 해요”라며 손님에게 요구하고, 일일 아르바이트생은 손님으로서의 본부에 충실하며 완벽하게 연기를 해낸다. 영상은 “달고 단 호박 요리”라는 이름으로 편집이 되어 가정마다 전송이 되고, 음식점은 ‘호박 전문 음식점’으로 포장돼 이른바 맛집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우리나라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되는 음식점은 일년에 약 9229개 정도. 일주일에 177개가 방영되는 셈이다. 맛집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번지고 난 후, PD와 작가들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세상에 없는 메뉴를 임시로 만들어 내 방송에 내보낸다. 급조한 메뉴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찾아갔을 때, 메뉴는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맛집 브로커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당당히 말한다. 맛집에서 중요한 것은 맛이 아니라 ‘그림’이자 ‘연기’라고. 우매한 시청자들은 ‘방송에 출연한 집’이라는 타이틀만 믿고 우르르 달려올 것이고, 우리의 몫은 앉아서 돈을 버는 일 뿐이라고.


  다큐멘터리는 방송사들의 기만과 조작, 횡포만큼이나 시청자들의 태도도 잘못 되었음을 지적한다. 한 음식 평론가는 “TV 속에 제대로 된 맛집은 단 한 곳도 없다”면서 “이것은 한국에 진정한 미식가들이 없다는 증거이며, 시청자들의 조악한 질을 대변 한다”고 말한다. TV 속 맛집에 대해 누구 하나 의문을 갖지 않는 현실과 맛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미식가들의 교양과 행동에도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트루맛쇼를 강요하는 빅브라더는 누구인가?”라는 멘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할 대상은 누구일까? 공중의 전파를 통해 비즈니스를 펼쳐는 포악한 방송사 관계자의 몫일까,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마저 팔아버린 음식점 사장님들의 몫일까? 아마 영상을 끝까지 시청한 이들이라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시청자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을.
 

  말복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제 더는 인터넷과 TV를 켜지 말아야겠다. 삼계탕을 먹고 싶다면, 차라리 택시 기사 아저씨나 주인집 아저씨께 물어보려 한다. 그리곤 ‘TV에 출연한 집’이라는 타이틀이 없는 집을 찾아 푹 고운 삼계탕을 맛 봐야겠다. ‘트루(true)’의 맛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소식지 <오름과 바당> 2011년 여름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안해요 강정”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 <Jam Docu 강정>을 보다

해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부산을 찾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불러주지도 초대하지도 않는 부산행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는 다양한 영화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3세계 국가들의 영화들을 비롯해 한국의 저예산 독립영화들까지, 국내에 배급되지 않는 영화들을 맛보는 기쁨은 실로 짜릿합니다.

이번 1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제게 ‘짜릿함’ 보다는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다큐멘터리 <Jam Docu 강정> 덕분입니다. 해군기지 건설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로, 8인의 감독이 100일 간의 작업을 거쳐 완성한 작품입니다.

제주가 고향인 나는 비겁했습니다

저는 대정 몽생이입니다. 제주도 대정이 고향이지요. 어릴 적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쭉 대정에서 보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도 서귀포시에 속하는 곳이니 ‘강정’이라는 지명은 제게 굉장히 익숙합니다.
 


대학시절, 해군기지 건설논란이 갓 불붙었을 때 저는 과 동기들과 한창 찬반 토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안하무인식으로 진행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저는 ‘반대’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주민들을 살살 꾀며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들이미는 정부의 방식이 싫었거든요. 그러나 당시의 저는 ‘찬반토론’에 참여한 치기어린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서울에 올라 와 먹고 살기 바빴던 저는 해군기지 논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가에서 사업을 접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까요.

해군기지 건설 논란은 ‘강정마을’로 이동했고, 제 예상과 빗나가는 일이 연일 일어났습니다. 주민의 반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주먹구구식으로 유치신청을 결정지은 ‘주민동의’에서부터 강제 공사 진행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이 맞나 하는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과 아픔, 진행 과정 등은 제주환경운동연합 소식지를 통해 접하셨을테니 굳이 또 한번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저는 강정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방관자였던 내 자신을 향한 자책어린 ‘자기고백’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평화의 물결에 동참하고 힘을 합하겠다는 어쭙잖은 ‘약속’은 덤입니다.

다큐 <Jam Docu 강정>을 통해 만난 강정마을

제주 강정마을을 주제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환호했습니다. 영상을 통해서라면 조금 더 유연하게 강정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예매를 했습니다. 부산에 있는 친구와 서울에 있는 친구를 불러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홧홧 거렸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강정마을의 이야기를 접하며 저는 그게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저의 무지몽매함에, 좀더 적극적으로 강정을 살리기 위해 애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다큐를 보는 내내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고향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가가 파괴되고 있을 때,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주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들도 강정을 살린다고 짐을 싸고 제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명절 때 제주를 찾았으면서도 강정에는 찾아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비겁한 방관자에 불과했습니다.

<Jam Docu 강정>은 영화는 경순, 권효, 김태일, 양동규, 전승일, 정윤석, 최진성, 최하동하, 홍형숙 등 8명의 감독이 ‘강정’을 주제로 짤막한 영상을 만든 후 하나로 모은 작품입니다. 감독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큐멘터리의 컨셉과 방향을 논의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나레이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8개의 작품이 물 흐르듯 이어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했고, 가슴 아팠으며, 화가 났습니다. 해군기지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동참해 주었기에 강정마을을, 구럼비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제가 참 바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름다운 강정마을의 해안가가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지고 구럼비가 박살이 난 장면을 보았을 때야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울지마요, 구럼비! 힘내요, 강정”

자신의 방식과 개성대로 영상을 만들어 나갔지만 감독들이 말하는 것은 한결 같았습니다. “파괴된 강정마을 해안가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두 힘을 모아주세요”라는 것. 거기에서 더 나아가 “무관심하게 방관하는 너희들도 정부 못지않은 가해자다”라는 따끔한 메시지도 읽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제게 교과서와도 같았습니다. 미처 몰랐던 것, 알아야 할 것,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친절히 알려주었거든요.

‘모슬포’라는 지명이 더 익숙한 대정의 해안가 마을에 살았던 저는 보말 잡고 수영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바다가 주민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삶의 터전 그 이상을 뜻한다는 것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강정 마을에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다큐 속에서 환히 웃으며 강정을 살려야 한다 힘주어 말하던 강동균 마을회장님은 구속되어 아직도 풀려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현실이겠지요.

제주도가 고향인 제의 정체성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고, 지금이라도 부끄러움을 안겨 준 8명의 감독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제주를 찾아서 강정마을에 찾아가 보려 합니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리얼한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저의 작은 힘을 보태주고 싶습니다.

어쭙잖은 자기고백을 하다보니 정작 <Jam Docu 강정>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 못했네요. 내용이 궁금하면 다큐멘터리가 상영할 때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기 바랍니다. 훌륭하니까요. 만약 기회를 놓쳐 다큐를 보실 수 없다면 강정마을에 직접 찾아가서 구럼비의 비명을 듣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울지마요, 구럼비! 힘내요, 강정”.

*본 글은, 제주환경운동연합 소식지 '오름과 바당'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