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트리 오브 라이프>
감독: 테렌스 맬릭
출연: 브래드 피트, 숀 펜


영화를 보기 전 성경 속 구절 '욥기'를 기억하라.

 영화를 보기 전, 영화 주간지 <시네21>을 통해 평을 참고 했다. 평론가들 평이 꽤 나쁘지 않았다. 자연다큐멘터리? 경건? 가볍게 볼 영화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웃고 소비해버리는 '킬링타임용 무비'보단 나을 듯 싶었다. 마침 이 영화를 본다고 트위터에 올렸더니 친구가 답멘션을 보내 왔다. "이 영화 어렵대"라고. 아뿔싸,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브래드피트와 숀펜이 나온다는데 눈은 즐겁겠지, 하는 생각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더군다나 201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 아니던가.

영화 시작. 난데없이 성경 속 구절인 욥기가 자막으로 올라간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욥기 38:4, 7)

평소 '다신론자'라고 주장하는 나는, 그래서 모든 종교에 얄팍한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기독교와는 불교만큼이나 친하지 않아 성경 한구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나였다. 그러니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영화홍보사에서 내세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버지, 그 시절 당신이 미웠습니다"

중년의 잘 나가는 건축가 잭(숀 펜 分). 그는 늘 같은 꿈을 꾸며 눈을 뜬다. 19살 때 죽은 어린 동생에 대한 기억. 오랜만에 아버지와 통화를 한 잭은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아마 영화사에서도 영화의 홍보 방향을 잡는데 꽤나 고심을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 그 시절 당신이 미웠습니다"와 같은 동양적이고 신파적인 카피를 뽑았을 것이며, '가족 영화'처럼 포장했을 것이다. (하긴 영화홍보사에서 짧게 일해본 경험에 비춰봐도, 이렇게 포장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줄거리를 빗나간다.



성경의 말씀이 경건하게 뜨더니, 난데없이 줄거리와는 상관 없는 듯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마치 한 편의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듯. 다소 황당하지만 큰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정말이지 환상적이다. 화산 폭발, 우주의 신비, 공룡의 멸망, 그리고 빙하기... 성경을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것은 '천지장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가 귓속말로 '욥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한때 기독교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다.) 친구의 말을 들으니 왜 이런 장면을 설명해주는지 알 것만 같다. 영화를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의 고난'에 대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난데 없는 장면들로 이뤄진 코미디물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에겐 왜 시련이 닥치는가?

욥기의 주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에겐 왜 시련이 닥치는가?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욥기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해지는 온갖 고난, 시련, 슬픔 등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에게 변치 않는 굳은 믿음을 바쳤던 욥도 큰 시련을 맞이하지 않나. 그것이 욥을 시험하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해도, 하느님의 시험은 사실 좀 "너무 했다". 갖고 있던 재산과 친구들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빼앗지 않았나. 그런데도 욥은 모든 것을 다 가져간 것 마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드린다.


깊은 신앙심을 갖고 하느님에 대해 잘 안다고 한들, 혹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고 섬긴다고 한들, 결국 인간은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절대자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라고.
결국 우주의 생성과 만물의 움직임에 인간은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네가 잘났다 한들, 아무리 네가 분노한다 한들.

10분 여를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볼 법한 신비하고도 경건한 장면들을 보여준 후, 감독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지금은 어엿한 중년이 된 회사원 잭(숀 펜)은 매일 밤 꿈 속에서 어릴 때 죽은 남동생을 만난다. 아빠와 통화를 한 후, 영화는 거대한 나무가 솟아있는 한적한 마을의 가정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잭의 유년기의 모습이 나온다.

가족, 생명, 그리고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자기 소개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엄한 아빠와 자상한 엄마' 사이에서 첫째 잭과 남동생 둘은 행복하게 살아간다. 큰 나무 밑에서 뒹굴고 뛰어놀며 재미있는 한때를 보낸다. 그러다 어느날, 둘째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 엄마는 오열하고 행복은 멈춰 버린 듯 싶다.

무수히도 반복되는 나레이션. "당신의 뜻은 무엇인가요? 왜 아들을 데려 갔나요?" 영화 시작 전 자막에 떠 있던 성경의 구절에 따르면 하느님이 아들을 데려간 건 "다 그러한 이유가 있느니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바탕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반추할만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화는 생명의 신비함에 대해서도 노래한다. 남녀가 사랑을 하고, 태아가 잉태된다. 어미의 몸에서 자란 생명은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태어난다. 조물딱 거리며 꿈틀대는 손가락, 발가락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 자체가 '생명의 나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가지 가지 팔을 벌려 나뭇잎을 품은 나무처럼, 쿵쾅대는 심장을 달고 태어난 아이는 온갖 생명을 줄기 줄기 잇고 있는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인 것이다.

영화는 그에 그치지 않고 남성들이라면 공감할 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야기 한다. 엄격한 아빠(브래드피드 분)의 훈육 방식이 못마땅한 큰 아들은 반항을 하고, 엄격한 아빠 대신 엄마는 자애로움으로 아이들을 껴 안는다. 아이들은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지만 이내 무시무시한 생각을 한 자신을 자책한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서 자신이 타락한 듯 눈물을 흘린다. 마음 속의 악과 선에 대해 계속 싸움을 하는 것이다.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신앙심이 깊다고 해서 인간이 선할 수만은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성장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생명, 삶,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크나큰 범주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인간의 삶과 우주의 생성을 신의 섭리로 풀어낸 대서사지,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은 미약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주변의 작은 것의 감사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한겨레 출판사)

 한겨레의 '21세기' 도서 시리즈 중 하나. 그동안 '한겨레21'이 특집을 맞아 좌담회를 벌인 내용을 하나로 묶어 책으로 펴냈다. 아마, 발간하다 보니 '시리즈'가 됐으리라.

 교양, 상상력, 거짓말 등을 주제로 일년에 한번꼴로 행사를 마련했는데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이 책은 한겨레21 창간 10주년을 맞아 2004년도에 펼쳐진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박노자(노르웨이오슬로국립대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홍세화(한겨레 기획의원),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정문태(국제분쟁 전문기자), 오지혜(영화배우), 다우드쿠탑(팔레스타인알쿠드스 교육방송국장)과 하루에 한 회 씩 총 7회의 대담을 담고 있다.

 역사, 노동, 전쟁, 연예, 국가분쟁 등 어느하나 중요하지 않을 수없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일상에 쫓겨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세대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러시아 출신의 낯선 외모를 한 박노자는 한국의 어떠한 역사학자보다 아주 객관적으로 한국의 역사를 평가한다. 맹목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옥시덴탈리즘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어서 일까, 역사는 객관적으로 서술된다.

 한홍구 교수의 역사관 역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 시대의 부조리가 괜한 것임은 아니란 걸, 지난 역사를 통해 시사한다. 급하게 먹은 밥은 체하 듯, 급하게 일으킨 경제성장은 시민들의 의식성장을 간과했고 그 결과 이 곳 저 곳 에서 정체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시민들의 '의식화의 중요성'은 진보지식인이라 일컬어지는 홍세화의 강의를 통해 두드러진다. 외국에서의 '보수'가 한국에서는 '진보'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부드럽고 섬세한 그만의 어조로 설명한다. 진보적 성향이란 의식화가 아닌 '탈의식화'의 과정, 즉, 수구세력이 장악해온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로 인해 형성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대한 탈의식화가 중요한 과제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하종강님의 강연도 인상적이다. '노동'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들 누구나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며 자그마한 관심이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내용을 잊지 않는다. 이 세상이 평등한 세상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세상인지에 대한 척도는 모든 근로자들이 얼마나 평등한 삶을 누리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근로자'의 범위가 단순한 일용직 노동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도 노동자가 될 수 있음을, 이미 노동자임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연예인은 무당'이라고 말하며 딴따라의 의식화를 강조하는 영화배우 오지혜의 대담도 재밌다. 그녀는 '와이키키브라더스'로 세간에 얼굴을 알렸지만 연극판에서부터 꾸준히 연기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의식있는 연예인으로서 정당활동, 강연, 글쓰기 등을 병행하고 있는 아주 부지런하고 똑부러진 여배우다. 

 분쟁전문기자의 정문태의 강연을 정리한 글도 인상깊다.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는 사각지대 안에서 냉정함을 유지한 채 취재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생각하게끔 한다.

 마지막 강연의 주인공 다우드쿠탑은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 라디오방송국을 운영하는 국장이다. 아랍계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묻는 특이한 그는 국가의 분쟁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잇단 무쟁공격과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아주 어려운 세계사를 배운 느낌이다.

  요즘들어 '한겨레'가 "과연 진보신문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그 결과 솔직한 내 느낌은 진보신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채찍질과 자기발전을 모색해보지만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상업성을 생각하지 않기란 어렵다. 신문도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사업이기에 수익성을 생각치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이러한 치열한 싸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한겨레를 보면서 사실, 실망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서 느꼈듯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화의 의식화' 즉, '탈의식화'다. 한겨레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노력을 통해 탈의식화를 하고 있단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에 한겨레의 미래는 밝다. 한겨레를 보는 나도 즐겁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감격스럽다.

책의 주요 주제: ‘복제된 오리엔탈리즘과 한국의 근대’(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 ‘좌절의 역사, 희망의 역사’(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으로 산다는 것’(<한겨레> 기획위원 홍세화), ‘너희가 노동 문제를 아느냐’(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시대의 무당, 딴따라를 말한다’(영화배우 오지혜), ‘전선 취재 17년의 비망록’(분쟁취재전문기자 정문태), ‘살람, 평화로 가는 길’(팔레스타인 알쿠드스 교육방송국장 다우드 쿠탑


2007년에 썼던 감상평을 옮겼습니다.


 
똥파리
양익준 감독/ 양익준, 김꽃비, 이환 등

 영화 <똥파리>가 개봉했던 2008년, 삼청동 선재아트센터에서 영화를 봤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극장의 분위기며, 나를 둘러쌓던 공기며,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강렬한 영화는 줄거리 뿐만이 아닌 그 순간을 모두 기억케 하는 힘이 있다. 당시에 영화를 보고 다소 흥분하며 썼던 영화평을 여기 싣는다. 손을 봐야겠지만 손 볼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흑.


'가족'은 얼마나 폭력적인 존잰가. 살아가는 데 힘을 주고 의지가 되는 소중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존재가 힘을 잃고 일그러져버릴 때, 한 핏줄을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은 얼마나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가.

무기력한 가족, 힘이 없는 가족, 삶을 황폐하게 내 던져버린 가족, 그런 가족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인가. 같은 피를 나눠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임을 행사하고 그 권한을 이용해 모든 고통을 감수하라는 건 정말 폭력적이다. 

 

영화 <똥파리>에서도 그런 가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보여준다. 극중 상훈(양익준 분)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안의 '가장'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 힘을 가진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이유로 부인을 때리고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폭력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들이 한 핏줄로 구성된 '가족'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상훈이 사채를 빌린 이들에게 돈을 수거하러 갈 때,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한 가장은 또 다른 이에게 두드려 맞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부인에게는 신이자,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다. 왜 그래야만 할까. '가족'이니까. 살을 한 데 비비고 살아야만 하는.

  이런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 역시 어른이 되어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징글징글한 가족을 떼어버리고 싶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가족 구성원의 삶에 짐을 져버리기도 하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죄책감' 혹은 '미안함' 혹은 '구질구질한 감정'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상훈 역시 핏줄이라는 것에 엄청나게 대항한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이새끼 저새끼" 쌍욕을 던지고, 너무나도 거칠게 대한다. 가족이라는 것에 굉장히 쿨해지려 노력하고 '내 피를 쏟아 저 새끼에게 부어버리고 싶'을 만큼 핏줄이라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런데 결국 그는 어떠했나. 자살시도한 아버지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냅따 달리지 않았나. 결국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가족을 위해 흘리지 않았나. 던져버리고만 싶었던 가족의 끈을 다시 움켜잡고 '새 삶'을 꿈꾸지 않았나.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도도리표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는 존재,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전형적인,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 가족의 폭력성과 또 그 반대에 존재하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절로 났는데 그 이유는, 나 역시 끊임없이 가족을 거부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는 상훈을 닮아서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리얼하다. 도대체 왜 우리네 가족들은 그렇게 아파하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야만 할까. 이 무시무시한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 덧붙이는 말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3년이 지나면서 가족에 대한 사고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가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시리 가슴이 아프고 울컥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나 핏줄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의무감 등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걸 여러차례 깨닫고 나서 더이상 '가족'이라는 존재를 민감하게 받아드리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후에 나는 되레 열심히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나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가족으로서의 의무라고 믿게 됐다. 가족이기에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족이기에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독립하여 잘 살아가야 한다. 어차피 핏줄이든 뭐든, 인생은 자신의 몫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