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 올해부터 틈틈이 읽는 책들의 서평을 올려보겠다.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내 삶의 모토는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게 살기’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를 읽으며 저자는 정말 유쾌하고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브래디미카코와 아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사유는 따스하고, 유쾌하고, 진지하고, 아프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 나 역시 유쾌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다문화, 인종차별, 성소수자, 계급 갈등 등의 다양한 주제를 골고루 녹아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의 문제를 거대한 담론에서 접근해 풀어내지 않는다. 아들의 학교생활, 이웃과의 관계 등 삶에 부대끼며 몸에 새긴 경험을 토대로 차근차근 써내려간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 것이리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두 다른 게 당연하고,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하지만 현미경을 들고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차별은 더 교묘하고 세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할지 성찰하게 된 시간이었다.

나머지 후기는 인상 깊은 문구와 사유로 대신한다.

p.34) 영국의 유아교육 시설에서는 보육의 일부로서 매일 연극적인 지도를 하고 있다. 웃는 얼굴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짓는 표정이며, 화내는 얼굴은 분노를 느꼈을 때 짓는 표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 한국 교육에서도 ‘연극’ 과 ‘토론’ 등의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문화에서는 아이들이 얼굴에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면 어른들게 혼이 났는데(특히 부정적 감정) 자신의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건 건강하고 당연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p.43) 사회에 다양성이 더해지면서 인종차별의 양상 또한 늘어나고 복잡해졌다. 이민자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도 그 속에는 온갖 인종이 있고 출신 국가도 제각각 다르다. 이민자 중에도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도 있다. 그 공방전을 지켜보는 영국인은 영국인대로 어느 한쪽을 편들며 다른 쪽을 차별하기도 한다.
- 이주민이면서도 인종차별을 일삼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보며 더욱 공감하게 된 문장이다. 인상 깊은 것은 다니엘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아들의 태도였다. ‘다니엘이랑 나는 최악의 적 아니면 최고의 친구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하며 기꺼이 다니엘과 관계를 이어가고, 결국 최고의 친구가 되어가는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p.63) 자신만이 정의라고 집단으로 믿어버리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든.
-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집단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같은 곳을 목표로 보고 있지만, 각기 다른 집단에 들어서는 순간 ‘목표’ 보다 중요한 것은 ‘위치’가 된다. 우린 과연 어디에 있는가. 과연 나만 옳고 저들은 그를까.

p. 74)“다양성은 좋은 거 아냐?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는데?”
“맞아.”
“그럼 왜 다양성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야?”
“원래 다양성이 있으면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법이야.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긴 하지.”
“편하지도 않은데 왜 다양성이 좋다고 하는 거야?”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되니까. (...) 다양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어렵고 귀찮지만, 무지를 없애기 떄문에 좋은 거라고 엄마는 생각해.”
- 너무나 훌륭한 엄마와 아들의 대화.

p.84) 애초에 법은 올바르다는 전제가 틀렸다고 생각해. 법은 세상이 잘 돌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서 반드시 올바르지는 않아. 하지만 나중에 또 법을 어기면 힘들어지니까, 그래서 팀한테 더 무거운 벌을 준 거 아닐까?
- 법은 완전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뜬금없지만 정인이 사건이 떠오르면서 소수자들에 대한 법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p.92) “시험에는 어떤 문제들이 나왔어?”
내 물음에 아들이 알려주었다.
“엄청 간단해. 기말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엠퍼시 empathy 란 무엇인가?’였어. 그다음은 ‘아동의 권리를 세 가지 적으시오.’였고. 전부 쉬운 문제들이라 누워서 떡 먹기처럼 백점 받았어.”
자신만만해하는 아들 옆에서 배우자가 말했다.
“그게 뭐야. 갑자기 엠퍼시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한마디도 못 할걸. 그거 엄청 심오하다고 할까, 어렵지 않냐? 너는 뭐라고 답을 적었는데?”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란 영어에서 쓰이는 관용적 표현으로 타인의 입장에 서본다는 뜻이다. 엠퍼시는 흔히 ‘공감’, ‘감정이입’, ‘자기이입’ 등으로 번역되는데, 확실히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 남의 신발을 신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 신발을 신으면 발이 아프고, 큰 신발을 신으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조건이 다른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보는 엠퍼시의 경험을 많이 해야겠다.

p.95~96) 결국 심퍼시는 ‘감정’ 또는 ‘행위’ 또는 ‘이해’지만, 엠퍼시는 ‘능력’인 것이다. 전자는 평범하게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즉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지닌 사람을 보며 품는 감정이기 때문에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하지만 엠퍼시는 다르다. 자신과 이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 또는 그다지 가엾지는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상해보는 능력인 것이다. 심퍼시가 감정적 상태라면, 엠퍼시는 지적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p.108) 인간이 남의 신발을 신어보려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한번 분발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야말로 선의, 아니 선의와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 내가 생각하는 ‘선’에 대해 돌이켜본다.

p. 124) 공립학교의 아이는 사립학교의 아이에게 좀처럼 이길 수 없는 현실, 공립학교의 선수가 통조림에 든 정어리처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황. 잭은 그런 것들을 있는 힘껏 웃어넘기려는 것 같았다. 풀 사이드 이쪽의 10대들도 모두 수영장이 떠나가라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서민 계급과 특권 계급. ‘99퍼센트와 1퍼센트’라는 말이 떠올랐다.

p. 237) 아이들에게 있어 양육자란 밖에 있다가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정적인 마음의 기지와 같은 존재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는 그런 존재를 ‘안전기지’secure base
라고 불렀다. 밑바닥 어린이집의 책임자였던 나의 스승 애니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안전기지를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어떡해야 자신이 안전기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육아를 힘겨워한다.”
-혹시 내가 육아를 힘겨워하는 이유는 안전기지를 갖지 못하고 성장해서일까?

p. 255) “다니엘한테 심한 말을 들은 흑인 아이나 언덕 위 공영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다니엘을 괴롭히는 데 끼지 않았어. 괴롭히는 건 전부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관계없는 애들이야. 그게 제일 기분 나빠.”
아들이 말했다.
“…인간이란 패거리로 어울려서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하니까.”
"나는 인간이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과연 인간에게 타인을 벌 줄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며 벌주기를 멈추지 않는다.

p.328)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쭉쭉 나아가며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일단 지금은. 색깔은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 나도 계속 색을 변화하는 사람이고 싶다.

 

 

'매일 읽고 쓰는 것의 위대함'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 <소설가의 일>을 읽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고 느낌을 남겨본다. 사실, 책 없으면 못 살 정도로(어쩌면, 책 안 사면 못 견디는 것일지도, 하하.) 책을 매일 읽는 나지만 독후감 쓰는 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왠지 작품 하나 더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기타 등등. 그래서 내 블로그에는 잡담만 넘쳐나고 영화평이나 독서평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안 읽고, 영화를 안 본다고 생각하면 아니돼요!

 

김연수 작가의 신작 에세이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안 사고는 못 견디겠어서 바로 주문했다. 따끈따끈한 책이 도착했고, 지난 주 토요일 서울가는 무궁화 열차 안에서 책을 읽었다. 뭐랄까, 책을 읽는내내 행복한 기분이 마구 샘솟았다.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에는 그런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김연수 작가 에세이를 남에게 권할 정도로 정말 정말 좋아한다(그러나 소설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변명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선호하는 작가의 작품을 구입해 읽는 편이다. 성석제, 이기호, 김애란, 백가흠, 최민석 작가의 작품이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바로 지르고 본다. 그런 성향이 있는데, 흠,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도 한번 열심히 읽어봐야겠구나. 주절주절.

 

 

 

<소설가의 일>은 김연수 작가가 매일매일 문학동네 카페에 올렸던 것을 책으로 엮은 거라 한다. 정말 부지런한 작가다. 스스로에게 혹독할 정도로 매일 시간을 정해 글을 쓰고 매일 달리며 체력을 키우는 김연수 작가에게 사람들은 '한국의 무라카미하루키'라고 말하기도 한다.(외국의 누군가에 빗대 '한국의-'라고 칭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김연수 작가가 하루키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사실같아 보인다.)

 

약속이 있어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 다음날은 평소보다 몇배는 더 글쓰기에 몰입한다는 김연수 작가. 그는 에세이에서 '재능보다 중요한 건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이리 겸손하실까?' 싶다가도, 이런 다재다능한 작가가 '재능'보다 '성실함'을 강조하니 나같은 아마추어는 힘이 날 수밖에. 예전에 김애란 작가의 글을 읽고 '루저들을 응원하는 따뜻한 응원가'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는 '아마추어 작가들을 응원하는 비타민' 같달까? (뭐라는 겨)

 

 

 

 

 

내가 김연수 작가의 이번 작품을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읽었냐 하면, 그 결과가 바로 이렇게 노트에 남겨져 있다. 나는 마음에 와닿거나 좋은 문장을 만나면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요즘엔 핸드폰 메모장이나 '에버노트' 기능을 이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손으로 적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다르긴 하다.

 

이번 작품을 읽으며 그가 이전에 썼던 에세이와 약간 틀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읽는내내 알랭드보통이 생각났다면 오버인가. 아니, 정말 그랬다! 보통의 작품을 보면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 도형을 비롯한 작가가 고민했던 생각의 흔적들이 이미지로 들어 있다. 김연수 작가가 캐릭터와 플롯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몇몇 장에서 그런 느낌을 발견했다. 새로워서 좋더라.

 

예전에 김연수 작가님의 강연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성신여대역에 있는 한 시민회관에서 열린 강좌였는데 작가의 말은 하나 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직접 겪고 체화한 이야기들이어서 그러리라. 정말 천상 작가에다, 부지런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은 미주알고주알 적지는 않겠다. 다만, 책을 읽는 내내 정말 들떴고 창작욕이 샘솟았다는 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어찌나 이렇게 구석구석 속속 위로해주는지, 나중에 공로패(아마추어 작가에게 힘을 준 공로에 대한)를 드리고 싶은 마음!

 

작가를 꿈꾸고 있거나, 아직 첫 발을 내딛은 작가들이라면 꼭 읽어봤음 좋겠다. 나는 엄연한 '소설가'는 아니지만 동화와 청소년소설(소설이긴 하구나)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배움과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수 많은 작가들을 얻었다. 김연수 작가가 언급한 작품과 작가들, 그들의 책을 또 지르고 말았다(사실, 레이먼드카버의 '대성당'도 김연수 작가님이 번역해서인지 참 좋아한다. 이번에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라는 여류작가를 알게 됐고, 단편 '검은집'이 실린 책을 찾다가 '리플리' 세트가 도서정가제 시행 전 특판을 하길래... 사고 말았긔.)

 

에세이집에 실린 모든 글들이 다 좋았지만, '마치는 글'은 정말 훌륭했다. 그 감동과 가슴 벅참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꾸준히 줄기차게!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 않고 한 걸음씩 뚜벅뚜벅 나아가는, 그런 작가이고 싶다. 김연수 작가님 작품을 앞에 두고, 맹세합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을 제대로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그러니 일단 써보라. 다리가 불탈 때까지 써보자. 그러고 나서 계속 쓸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자.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 있을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거다.>

 

 

 

 

 

진실을 향한 기록, <다이빙 벨>

'우리도 어쩌면, 언젠가는'

 

 

다큐멘터리/ 감독: 안해룡, 이상호

 

<다이빙 벨>을 봤다. 2014년 11월 12일, 오후 4시 10분 영화를 봤다.

 

외근을 나갔다가 일찍 끝나서 바로 동성아트홀로 갔다. 대구에 온 지 7개월.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극장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곳, 아마 대구에서는 거의(?) 유일한 곳이 아닐까. 지역에 이렇게 독립영화관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한 달 전에 이 곳에서 연상호 감독의<사이비>와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연달아 두 편 봤다. 이때도 평일이었는데,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고무적이었다고나 할까.

 

말이 길었다. <다이빙 벨>을 보는 동안 몹시 불편했다. 어이가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 부채감이 나를 짓눌렀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이제는 잊자, 하였건만 사실 잊기 위해서는 넋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도 잘 알지 않는가. 집안에 누군가 돌아가시면 시신을 잘 닦아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르고 기도를 하며 보내준다는 것을. 그게 원칙이다. 그래야만 산 자도, 망자도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올해 4월, 나는 기적을 바랐었다. 여객선인 세월호에 이상이 생겨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회사에서 일을 하다 <전원 구조>라던 언론의 보도를 믿었다. 그리고 곧바로 배신. 실은 단 한명도 구조되지 않았다 했다. 이어 몇 명이 구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구조는 없었다. 시신만 건져 올릴 뿐. 찾지 못해 실종된 시신도 여럿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뭔가 이상하고 찝찝했다. 그러나 그 기분이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언론' 밖에 없었으니까. 수십가지 언론사가 입을 맞춰 "정부 차원에서 구조 작업이 한창"이라고 말했다. 수색 과정에서 잠수사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고, 해류가 너무 세서 구조를 중단해야 함에도 열심히 바다에 뛰어들고 있다 했다. 그리고 그걸 믿었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거다. 믿는 수밖에 없지 않나.

 

 

 

 

밤낮으로 언론보도에 귀 기울였다. 일을 하면서도 인터넷 속보 창을 띄어놓고 십 분에 한 번씩 '새로고침' 했다. 기적을 바랐다.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구조작업은 더뎠다. 언론에서 그게 참 힘든 일이라고 하길래 '그렇구나' 했다. 그럼에도 이상했다. 아니 도대체 어째서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하는 걸까? 배 안에는 왜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그게 그리 힘든 걸까?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세월호 수색 작업이 더딘 틈에, 갖가지 '카더라' 통신이 흘러 나왔다. 홍가혜라는 여자가 언론에 인터뷰를 하면서 "자기는 민간잠수부인데, 정부에서 잠수부를 투입하지 않고 있다. 민간잠수부의 협조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영상이 SNS를 타고 떠돌았다. 하지만 곧, 그 여자의 '정체'가 밝혀졌다. 허연증이 심한 '이상한' 여자라는 것. 나도 개인 SNS에 이 여자의 주장을 실었다가 삭제했다. 그 아래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다. '이 여자 또라이래' '이 여자 정신 나갔대.'

 

그러다 또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나와 울부짖는 영상이었다. 나라에서 수색을 대충 한다고, 여기 현장에서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다고,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고. 그 영상을 보고 정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피 쏟는 절규를 쏟아내는 동영상을 가짜로 만들기는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의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만들어낸 영상일 수도 있다고 아니면 가족을 매수했다고 하지 않겠나? 억측이 아니다. 그렇게 국민들은 진위를 모른 싸움에 휘말려 세월호가 침몰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행동이라는 괴담이 떠돌고, 유병언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보도 되고, 그런 보도들 속에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모든 게 정치적으로 얽히고 섥힐 뿐. 진물나게 싫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실망한 것은. 많이 피로했을 것이다. 국민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희망,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보였다면 국민들은 이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걸 깨닫고 힘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는 우리에게 희망의 반대를 보여줬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결국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나 역시도 잊은 듯 했다. 생각나면 마음이 아프고, 괜히 손가락질 받는 것 같은 그런 부채감에 시달렸다. 당장 급한 일들을 하고 살아가면서 세월호 사건에는 귀를 닫았다. 그러던 중, <다이빙 벨>을 보게 됐고,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꼈다.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 이제라도 봐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언론과 정부에 대한 분노.. 등등.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다이빙 벨>은 철저히 누군가를 위해 편집된 영상이라고. 영상은 애초 촬영 때부터 편집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변치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부가 세월호를 수색하는데 안일했고 게을렀고, 심지어 왠일인지 하지 않았고 '다이빙벨' 투입을 방해했다는 것. 그것만로도 정부는 국민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팩트를 취재하지도 않고 소설쓰듯, 창작해 기사를 작성한 언론들. 과연 이들이 저널리스트인지 의문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이빙 벨'이 최선이고, 세월호를 짜잔! 하고 들어올릴 슈퍼맨 망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잠수사들의 피로를 줄이고 작업시간을 늘릴 수 있는 '좋은 도구' 임에는 틀림 없다고.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기록한다. 세 명의 잠수사가 다이빙 벨과 함께 작업했을 때의 시간과 컨디션을. 투입해서 잠수사들의 능률을 올렸다면, 적어도 세월호 선체 안에 진입은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또 하나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 개인을 국가가 왕따시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파잠수사 대표 이종인 씨와 이상호 기자가 바로 그러하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주 약간 기록되긴 했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 같은 것을 여러번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보며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책도 생각났고, 그 옛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빨갱이라 감옥에 쳐넣었던 살아있는 일화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백산맥>을 집필하는 동안 무수한 협박을 당했던 조정래 작가도 생각났다.

 

개인의 호의와 정의가 어떻게 둔갑 되는가. 거기에 있어 언론은 얼마나 힘이 세고, 그래서 얼마나 폭력적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했다면 오버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도, 너도, 우리도 언젠가는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정의를 향한 목소리만으로 '반정부주의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정말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알 권리를 대신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집단인데 정부의 들러리 역할을 한 지 오래고,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대의를 져버린다. 알쏭달쏭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 사건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남의 집 불난 구경하듯, 바라봤다가 큰 코 다치게 될 지 모른다.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폭력들이 무한반복되고 있는 세상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단,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이빙 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 다이빙벨(diving bell) 이란? (백과사전 펌)


잠수부를 바닷속으로 이동시키고, 물속에서 오래 머물며 수중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비. 종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잠수종'이라고도 한다. 개방식 또는 습식(wet bell)과 폐쇄식(closed bell)으로 나뉘는데, 개방식 또는 습식은 윗부분에만 반구형의 둥근 지붕이 있고 하부는 개방된 형태로, 잠수부의 하반신은 물에 잠긴다. 폐쇄식은 밀폐되어 외부와 차단된다. 어느 것이나 수면 위의 바지선에서 기중기에 매달아 일종의 수중 엘리베이터처럼 바닷속으로 내렸다 올렸다 하는 방식으로 운용되며, 바지선과 연결된 관을 통하여 공기압축기로 다이빙벨 내부에 산소를 공급한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잠수부들이 직접 수면에서 수중의 목적 지점을 잠수하여 오가면서 소모될 체력과 산소를 비축할 수 있으며, 이곳을 일종의 베이스캠프로 활용하여 잠수부들이 휴식을 취하고 감압(減壓) 장비를 거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수면 위의 바지선에서 잠수부에 부착된 CCTV를 통하여 수중 활동을 모니터링할 수 있고 잠수부와 통신할 수도 있어 해저 작업에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