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김정미의 창작놀이터

[포트폴리오] 숭고한 밥벌이/[04~현재] 프리랜서 사보기자 +1

 

제주 4.3평화재단 기관지인 <4.3과 평화>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학보사 선배님의 청탁을 받아 쓴 '탐방기'입니다.

(S선배, 감사해요! *.* )

 

제목은 <아이야, 기억하자꾸나. 제주4.3의 아픔을...> 입니다.

 

2015년 7월호니,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이렇게 틈틈이 쓴 글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제야 올리려니 다 올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원고 전문>

아이야, 기억하자꾸나. 제주4.3의 아픔을...

동화작가 김정미

 

해마다 제주가 낯설었다. 고향 제주를 떠나 뭍으로 나간 지 7년. 강산이 바뀌기에는 아직 모자란 시간이지만, 제주에 올 적마다 ‘휙휙’ 변해가는 모습에 적응이 안 됐더랬다. 그런 제주를 어떻게 마주봐야할지, ‘육지’에서 제주와 어떻게 연을 이어가야할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에 발 딛을 때마다 관광객인 척 시치미 뗐다가 서둘러 비행기에 몸을 싣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한동안 멀어졌던 4‧3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7월 3일 금요일. 여름의 길목에 선 제주는 몹시 싱그럽고 눈부셨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 근무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운 좋게 제주4‧3평화기념관과 공원을 둘러보게 됐다.

 

기념관에 들어가기 전, 잔디밭에 덩그러니 놓인 벽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독일 통일의 상징물 ‘베를린 장벽’이었다. 2007년 제주도가 독일 베를린시와 친선을 맺으며 돌하르방과 교환한 것이라고 한다. 베를린시 어딘가에 위풍당당 서 있을 돌하르방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념관에 발 딛자마자 영상실부터 찾았다. 4‧3사건 유족인 한 청년이 제주 4‧3의 역사와 진상규명의 노력, 제주4‧3평화공원 건립 등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4‧3사건을 바로 알게 되면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청년의 얼굴 위로 내 대학시절이 겹쳐졌다.

 

‘4‧3’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치기 어린 학생기자 시절이 떠오른다. 제주대학교 03학번이었던 나는 학보사 수습기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4‧3기행을 떠났다. 워낙 볕 좋은 날이라 봄 소풍 가듯 마냥 설레고 즐거웠다. 그런데 발 딛는 곳곳마다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라고 했다. 머릿속에 ‘빨갱이’ ‘폭도’ ‘좌익’ ‘우익’ 이라는 단어가 뒤엉켜 둥둥 떠다녔다. 대체 빨갱이가, 좌익과 우익이 무엇이기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걸까?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무슨 죄이기에 가족을, 마을을 모두 말살시킨 걸까. 북촌 너분숭이를 둘러보고, 허리를 굽혀 다랑쉬굴에 들어가면서도 궁금증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인터넷으로 허겁지겁 ‘이데올로기’의 뜻을 찾아봤다. 그런데도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과연 죽음의 당위가 되는지를 말이다.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이유 없이 죽음만을 위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무자비한 강압과 폭력 앞에 사람은 벼룩만큼이나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천둥벌거숭이 같던 대학 시절의 기억을 뒤로하고, 4‧3 전시관으로 향했다. 총 6개의 전시관과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돼 있었다. 규모가 꽤 커서 놀랐고, 애니메이션과 영상 자료 등 세대별로 눈높이를 맞춘 프로그램 구성에 두 번 놀랐다. 또 흔들리는 섬, 바람 타는 섬, 불타는 섬, 흐르는 섬 등 4‧3의 정체성을 담아낸 전시관 이름에 세 번 놀랐다.

 

4‧3사건의 주 피신처였던 동굴의 모습을 재현한 ‘역사의 동굴’을 지나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4‧3 백비’가 나를 맞이했다. 봉기‧항쟁‧폭도‧사태‧사건 등 다양하게 불리어왔지만 ‘진짜 이름’을 찾지 못한 제주4‧3에게 나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전시관을 통해 제주4‧3이 어떻게 발화되었는지, 학살의 이유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토벌대의 학살과 무장대의 공격으로 어떻게 제주도가 어떻게 죽음의 섬이 되어갔는지를 살필 수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제주4‧3을 통해 도민의 1/9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희생자 다수가 노인과 여성, 어린이 등의 약자였다. 또, ‘곤을동’ ‘오우눌’ ‘리생이’ ‘드르구릉’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의 마을 84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제주 4‧3의 가장 큰 아픔은 공동체의 붕괴에 있을 것이다. 가족처럼 서로 돕고 믿고 의지하던 이웃이 한 순간에 ‘적’이자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낯선 침묵의 시간을 유족들은 어떻게 견디었을까.

 

‘다랑쉬 굴’을 재현한 특별전시관도 매우 인상 깊었다. 1992년 발굴 당시의 유골, 옷가지와 그릇 등의 물품을 그대로 재현했다. 등 한 번 펴기도 힘든 낮은 동굴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행여 토벌대에게 걸릴까봐 빽빽 울어대는 아이의 입을 막는 바람에 여러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내 안에 돌고 돌아 글이 되었으리라.

 

전시관에는 4‧3 유족들의 증언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TV를 가득 채운 주름진 얼굴을 보자 기억 저편에 있던 민국이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민국이는 나와 같은 마을에 살던 4살 어린 남자아이였다. 민국이 할머니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는데, 어쩌다 다친 것인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무덤까지 들고 가야할 비밀인 것처럼 어린아이의 보챔에도 어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이 된 나는 ‘4‧3 아카이브전’ 전시영상 속에서 민국이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4‧3 유족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담아뒀던 것들을 숨 가쁘게 토해내는 할머니 모습에 그제야 4‧3이 피부에 와닿았다. 4‧3이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어찌나 부끄럽고 아프던지.

 

전시관을 둘러본 후, TV에서만 보던 4‧3공원으로 향했다. 경건하게 솟은 4‧3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귀천’이라 이름 붙여진 조형물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치형의 위령제단을 통과해 위패봉안소로 들어갔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1만5천여 개의 위패가 마을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차마 이름도 확인되지 않아 ‘누구누구 댁’ ‘누구누구의 자(子), 녀(女)’라고 적힌 위패들이 많았다.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시신이 여기에 놓였다면,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이름들은 야외 ‘행방불명인 표석’에 새겨졌다. 봉안소를 나와 저 멀리 까맣게 솟은 표석들을 보는데 그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육(肉)을 찾지 못한 누군가의 죽음들이 줄줄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졌다.

 

제주 4‧3사건이 발발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4‧3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4‧3사건 유족들이 저마다의 동굴에서 나와 아픔을 알린 지도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4‧3 유족들에게 고개 숙이며 공식사과를 했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요 몇 년 간 움트던 희망이 짓밟힌 것 같아 상심했다. 그러나 4‧3평화기념관과 공원을 둘러보며 안심했다. 역사를 기록하고 증명하는 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또렷이 전해질 것이기에.

 

4‧3평화기념관 ‘생명평화의 벽’에 붙어 있던 쪽지 하나가 떠오른다.

“무서웠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갓 한글을 배웠음직한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에 가슴이 뜨끔해졌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진짜라고 우기고 싶어질 때마다, 표독스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려고 할 때마다, 동화를 쓸 때마다 기억해야겠다, 아이의 쪽지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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